환희1

외통궤적 2008. 7. 19. 21:28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2534.010801 환희1

‘거제리’ 수용소 안은 대형천막으로 가득 찼다. 뒤죽박죽 식사시간은 나를 내가 기거하는 텐트에 족쇄 없이 매달고 있다. 하루 중 어느 시간으로 식사시간이 정해질지 모른다. 아직도 이곳은 포로들이 들어오는 아가리 구실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럴만하다.

 

흰 광목으로 된 ‘인민군’내의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드문드문 눈에 뜨인다. 모름지기 그들은 하루 전쯤에 들어와 아직 의복을 지급받지 못해 항의의 표시로, 그들이 당당한 ‘인민군’의 냄새를 색깔로 들어냄으로써 어떻게든 억울함을 시위라도 할 양, 하릴없이 몰골사나운 속옷차림으로 철조망 주위를 배회하는지도 모른다.

 

 

바람은 트인 공간을 자유로이 휘젓고, 미물인 방아깨비조차도 철조망 안 밖을 자유로이 넘나드는데, 내가 나고 내가 자란 이 땅의 주인은 겨우 가시철망 속에서 방아깨비의 꼬리나 붙잡고 하늘높이 날린 뿐이다.

 

방아깨비가 철조망을 훌쩍 넘어서 밖으로 나가면 환호와 갈채가 이어진다. 둥그렇게 모여 있던 포로들은 오늘의 운수를 길조로 점치고 계속 환호한다. 영문을 모르는 망루의 ‘국방군’ 아저씨는 어느새 포로들의 함성을 보고했는지 ‘지이아이’ 라고 일컫는 미군병사가 들어와서 샅샅이 살피지만 우리 모두는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만 찢기고 아무것도 보일 것은 없다. 미군 병사는 양어깨를 귀밑까지 두어번 올리면서 싱겁다는 듯이 뒤돌아보고 가다가 다시 뒤돌아보며 사라졌다.

 

 

천막주위의 배수로도 정비가 됐고 공터의 돌도 주어 한쪽으로 날라 모았으니 바닥은 빤질빤질한  길이 되었다. 드디어  아침 체조를 하는 성실파도 생겨났다. 아침을 제 시간에 먹은 텐트의 포로들은 그 날 일을 나가는 징조를 알았음인지 여기에서도 환호성 터진다.

 

밖에 나가면 민간인들과 먼 거리에서 몇 마디 주고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그리하여 전황을 귀동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변화의 조짐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일반인과 대화함으로서 이 땅에 뿌리박은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부인과의 대화는 일체 금지되어있는 규칙을 경비병 '국방군' 아저씨가 이를 용납할 리 없다. 그럴 때면, 그들에게 포로용담배 '골든밧트' 한 갑만 슬쩍 길섶에 놓고 가면 민간인과 문답하는 것에 대해서 듣고도 못들은 척, 먼 산을 처다 보며 외면하므로, 쉽사리 귀동냥을 할 수가 있다.

 

 

내 고향은 강원도 ‘통천’, 이미 동해안을 따라 원산을 거쳐서 함경도에 이르는 가파른 오름 길(?!)을 진군하고 있다는, 간간이 흘러들고 있는 소식이긴 해도 믿을 만한 소식은 하나도 없다.

 

 

임시로 정해놓은 연락책이 한 천막에 한 사람씩 마련되고부터는 그들이 하루에도 몇 번식 불리어 가게 되는데 그때에 그 날의 지시사항과 응급사항을 전해준다. 밥 타먹는 시간과 청소하는 구역, 작업인원을 차출하는 등 자질구레한 일이 우리들 포로들의 일상이 되고보니 나라, 국토, 인민, 민족, 따위는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봄날에 아장걸음으로 들에 나와서 벌을 품는 꽃술을 보고 망연(茫然), 무아의 눈망울을 깔듯이 우리도 어린애가 된다.

 

나의 현실적 억류를 망각하고, 내 땅 내 동포란 거창한 것들은 깡그리 잊고, 단지 백치의 양태로 그냥 양지쪽 천막 문 앞에 서 있다. 그러고 따뜻한 남쪽나라인 제 갈 곳, 그리워 나래 짓하며 철놓쳐 서둘던 제비무리가 갈라 친 빈 하늘만 무심이 바라보며 허망해할 따름이다.


이미 제비는 남쪽으로 갔다. 우리는 북쪽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늘 길도 땅 길도 열리지 않는다.눈망울을 깔아서도 시원치 않으면 거꾸로 치켜보자.

 
우리는 머지않아서 고향으로 갈 것이고 그때에 새 세상에서 새 문물과 부닥쳐야하고 적응해야하는 일이 해방당시와 다를 바 없을 테니 미리 준비하여 <남조선>세상에 익숙해야하는데, 우선하여 이런 좋은 조건으로 선험(先驗)하게 된다는 것에 자위도 해보지만, 거꾸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우리에게 상당한 불이익이 있을 것 같은 우려도 상당하여서 이에 대한 논란이 포로들 간에는 영일 없는 토론거리로 되었다.

 

그런 중에 전선이 평안북도에 이르고 일부는 압록강에 닿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압록강! 함께 두만강도 입에 오르련만 아직 두만강을 말하는 이가 없다. 그래도 우리는 천막을 흔들며 환호하고 열광하는 것이다.

 

 

당착(撞着)? 우리는 응당 슬퍼해야 할 처지에 있는 포로들인데도, 억류하고 있는 적(?)이 우리의 숨통을 마지막으로 조이는데도, 환호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 싸움이 전쟁이 아니라 통일로 가는 한 과정임을 자각하지는 못할지라도 민족적 동질의 두 덩이가 걷혀지는 인위적 장벽을 걷어 냄으로 해서 합쳐진다는 사실을 아무도 일깨우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이렇게 환호하는 것이다. 덩달아서, 어릿광대 축에도 못 끼는 나 같은 무지렁이도 신이 날밖에 없다.

 

오늘 하루에만도, 벌써 주머니 속을 들락거린 손자국에 작업복바지의 커다란 주머니 쇠단추가 반짝거리도록 달았을성싶다. 양말과 장갑은 여전히 잘 개켜서 있다. 꺼내 보는 내 마음이 그지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것은 머지않아서 내 혼이 담긴 이 금쪽같은 뜨게 장갑과 양말을 부모님께 엎드려 바치면서, 지난 일의 용서를 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외통-



'외통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양한 앞길  (0) 2008.07.20
수용소2 동래  (0) 2008.07.20
장갑  (0) 2008.07.19
누릉지  (0) 2008.07.19
동창생  (0) 2008.07.18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