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외통궤적 2008. 7. 1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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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3.010731 장갑

가시철망 울밑에 돋아났던 바랭이 풀이 윤기 나는 새 순을 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싱그럽던 성장을 멈춘 듯하다.

내 어릴 적 고향에서, 꽃핀 바랭이 풀을 소에 뜯길 때쯤에는 가을걷이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소 먹이며 바라보던 들판의 정경이 아른거려서 고개를 들어 북쪽 하늘을 바라본다.

팔소매를 파고드는 바람이 서늘하다. 허리 잘린 버드나무 잔가지에 매달려서 반짝 반짝 빛내며 흔들던 잎들이 벌써 뻣뻣한 잎줄기 성화를 못 이겨 겨우 고개만 아래위로 흔들고 있는, 늦가을에 접어들고 있다.

북쪽 바람막이 언덕 밑의 양지바른 논배미에선 벼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계절을 잊은 듯 새파랗게 돋아있다.

제대로 자란 바랭이와 허리는 잘렸어도 뿌리만은 영고(榮枯)를 함께 하려 힘차게 박혀있는 버드나무는 순환의 이치에 순응하여 겨우살이 준비를 하고 있건만 송두리째 잘려나간 벼 포기는 자기의 삶을 잃었어도 행여 천우(天佑)의 새 삶을 꾀하려 몸부림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진되는 날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려 하는 것일까?

하늘을 향해서 고개를 치켜든다.

이 노래 소리는 나를 환청(幻聽)의 경지로 끌어낸다.

경지를 넘겨서 약동의 몸부림으로 승화시킨 것인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존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나는 살아있다.

겨울의 강을 훌쩍 뛰어 건너서 저쪽 기슭에서 물고기와 더불어 삶을 구가하려 한다.

오랜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아주 먼 귀향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피안의 행복을 위해서 무언가를 미리 해야 할 것 같아, 끌린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철조망 뭉치를 수용소 안에서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조금 굵긴 하지만 뜨개질하는 바늘 감으론 그런 대로 쓸 만할 것 같다.

뜨개실은 어디에서 구하는 것인지 몰라서 실의 출처를 알아보려고 이미 뜨개질을 하고 있는 같은 천막에 기거하는 나이 오십 줄에 든 어른께 묻는다.

그 대담은 이 수용소 안에는 없단다.

그럴 리가 없다.

자세히 들여다본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뜨는 실의 일정 길이에 반드시 매듭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마도 무진장의 실 원료의 보고를 노출시키지 않음으로서 앞으로 자기의 뜨게 감을 보존하려는 의도였거나, 널리 보급되어서 수용소 관리미군에게 알려지면 이제까지 떠놓은 갖가지 물건들을 빼앗길가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알려주지 않으면서도 뜨개질을 계속하는 선각자(?)가 우리 천막 안엔 여럿이 있다.

아무소용 없는 짓이다.

겨우살이의 해결은 억류하고 있는 쪽의 당연한 의무가 아닌가!

설혹 만족스럽지 못해도 모두가 겪고 견디는 곳에서 나만 못 견딘다면 나는 응당 도태되어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아니다.

어머니를, 아버지를, 할머니를, 형제자매들에게 고백하고 내 각고(刻苦)를 뜨게 소품에 알알이 담아서 거증(擧證)하리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마음을 굳혔다.

남자가 뜨개질을 한다?

어머니가 아시면 벼락을 내리실 것이지만 그 많은 사연을 응축시켜서 작은 곳에 담으려는 내 마음을 아신다면 멀리서 지성으로 천지신명께 내 뜨게 질 성공을 비실 것이다.

나는 어둠이 깔릴 때에 걷어가지 안은 가시철망 타래가 있는 곳으로 가서 가시철망을 한발쯤 돌로 두들겨서 꼬부라뜨리고 감시병의 눈을 피해 돌을 버렸다.

그러고는 옛 사람들 말대로 세월아 네월아, 세월이 좀먹느냐, 며 구부렸다 폈다 하기를 수없이 반복해서 그 효과를 얻었다.

반복자극은 철사도 끊어낼 수 있고 물방울로도 바위를 뚫는 이치가 여기에도 있다.

가시를 도려 빼내는 일은 내일 할 양으로 나만 아는 곳에다가 다람쥐 밤 묻기로, 묻었다.

다음 행동이다.

천막의 고정 끈은 마사(麻絲)를 몇 겹으로 꼬아서 만든 푸른색의 것과 면을 여러 겹으로 겹쳐 꼬아서 만든 흰색의 두 종류가 천막 따라서 다르게 주어져 있는데 이 중 면으로 만든 흰 끈이 달린 천막을 찾는다.

천막의 처마마다 너무 촘촘한 간격의 구멍에 모두 붙들어 맬 수 없어서 건너 뛰어가며 말뚝에 매고 나머지는 그냥 끈으로만 매달려있는 곳이 더러 있는데 이런 것은 그 끈이 무용지물이니 먼저 보는 사람 것이다.

그러나 나같이 필요한사람이 있는가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까짓 끈이 산더미를 이루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세상만사가 이같이 적・부적의 이치로 뒤섞여 어우러지면서 의미 있게 꾸려지는 것이리라.

철사를 뼘 반 길이로 세 토막을 내어서 돌 위에 놓았다.

조막 돌을 쥐고 반듯하게 두들겨 펴고는 끊기 있게 참아가며 철사의 끝 여섯 개를 둥글게 갈았다.

드디어 한나절 만에 뜨개바늘 세 개가 만들어졌다.

텐트 줄도 일일이 풀어서 실 가닥을 보태거나 떼어 고르게 세어 이어서 뭉치를 몇 개 만들었다.

기본적인 것,

코를 만드는 일은 어릴 때 누나한테 배워 익히 알지만 뒤집어 뜨는 일, 코 늘이는 일, 코 줄이는 일, 마지막 막는 일은 온통 내 힘이든지 곁눈질이든지 알아서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은 세월을 짜는 일이니 잘못되면 다시 풀어버리면 된다.

그래서 나는 나름으로 시도하고 고치며 뜨개감 코 수를 늘려가는 것이다.

내가 하는 짓이 하도 답답했던지 옆에서 지켜보는 다른 사람이  몇 코를 떠서 가르쳐 주기도 한다.

내가 하다가 몇 번을 실패하기도 하면서 양말 한 켤레가 완성되었다. 양말을 마친 며칠 만에 장갑도 한 켤레 떴다.

양말의 뒤꿈치를 뜰 때, 한겨울 아침 창호지를 뚫고 비친 햇빛아래서 갈라진 발꿈치에 소기름 녹여 바르시고, 밥풀을 이겨서 무명천에 발라서 갈라진 틈새를 조이고 그 위에 단단히 천 쪼가리를 붙이고 또 붙여서 세 겹 네 겹으로 붙이시든 아버지의 생각이 뜨개바늘 끝에서 확대되어 뜨던 손놀림이 멈추어지곤 했다.

또 장갑의 손가락을 뜰 때, 한겨울 아침상을 물리시고 화로에 손 올리시며 갈라진 손마디에 소기름을 녹여 바르시던 할머니의 까칠한 손마디가 내가 뜨는 장갑의 손가락에 들어오는, 환각에서 벗어나려 눈을 비비고 숨을 고르곤 했다.

나는 보물을 마련했다.

이보다 더 귀한 보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머지않아서 우리도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다지고 다지게 되었다.

고향에 가게 되면 이 장갑과 양말은 우리의 조상에게 바치고 나의 후손에게 대대로 전하면서 억류되기까지의 고초를, 억류생활의 산 증거로 영원히 물려서 나를 세상에 남아있게 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매일같이 하게 되었다.

나는 매일 한 번씩 이 뜨게 장갑과 양말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면서 부모님을 만날 날을 꼽고 있다.

조금도 따습지 않을 양말, 뿐만 아니라 기름칠한 천막 끈으로 뜬 구멍이 숭숭한 볼품없는 면사양말, 끼어서 오히려 손 시린 장갑, 손바닥 들어다 보이는 기름칠한 면장갑, 이 두 가지 네 짝이 내 신주요 수호신으로 정했음을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눈치 챌 수 없다.

냉기가 등허리를 조여서 모로 눕지만 잠시 후 오금이 가슴팍을 찌르는 잠자리, 바람에 펄럭이는 천막 포장이 풍구질을 하며 바람을 일으켜서 얼굴을 할퀴고, 스치던 찬바람이 발밑을 얼린다.

그래도 나는 내가 뜬 양말을 내 발에 신지 않았고 내가 절은 장갑도 내 손에 끼질 않았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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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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