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리’는 내 생애에서 지울 수 없는 수모의 낙인이 찍힌 곳, XXXX 이란 비교적 빠른 번호판을 가슴 앞에 대고 현대판 낙인(烙印)을 사진으로 찍었다.
머리를 깎고 새 옷을 받아 입던 날, ‘거제리’ 수용소에 온 사흘 후에 낙인된 이 번호가 내 정신과 육체에 골 깊이 새겨진 채로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리란 생각, 미쳐 꿈엔들 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차츰 현실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해는 점점 짧아지고 귀향의 소식은 올 듯, 올듯하면서도 오질 않는다. 부득이 겨울을 날 채비로 마음이 굳혀질 무렵에는 야속하게도 새 세상의 훈기를 조금이나마 맡을 수 있는 철조망의 조막 구멍마저도 점점 그사이를 좁히고 있다.
한 겹의 철망이 두 겹으로, 두 겹의 철망을 다시 세 겹으로, 그것도 못 믿는지 사이사이에 원형 철망을 설치하고 있으니 심상치 않은 징후를 감지하게 하는, 요사이 철조망 주변이다.
그동안 배운 탓으로 대형텐트의 설치 작업은 으레 나를 포함하는 자릿수가 낮은 번호의 포로들이 도맡아서 했다. 이 일만큼은 이골이 나서 수월하게 됐고 자연스레 텐트 치는 일은 우리의 몫이 됐다.
텐트 치기는 해 본 사람이 요령을 부려서 수월하게 세운다는 것을 알고 있는 미군들은 입이 덜 아프고, 골치를 적게 썩이는 경험(?) 있는 포로들을 선호해서 우리를 동래작업장으로 끌고 다니더니 급기야 우리와 같이 일찍 잡힌 포로들을 이동시킬 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포로수용소 설치 개척자 셈이다.
우리 몸에 흐르는 오랜 농경 정착 생활의 농도가 그나마 그동안의 안정된 수용소 생활을 위로 삼았었는데 이제 다시 한 천막 밑 잠자리가 될 수 없고, 밥그릇 마주 놓고 피차의 입김을 볼 수 없는, 당분간 서먹한 날을 보내려니 달갑지 않고 도리어 짜증스럽다.
그것은 미군들의 합리적인 사고가 우리의 연고나 친소(親疎) 관계에 의한 폐단을 익히 잘 알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를 흩어서 극소단위로 쪼개서 우리로 하여 작당이나 불순한 음모가 꾸며지는 것을 미리 차단하려는, 고도의 술수인 것을 우리가 알 리가 없다. 어떤 경우에도 헤어지지 않으려는 그동안 정든 짝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손잡고 붙어 다니는 고향 선후배, 이런 것을 눈치챈 미군들과 수용소 안의 포로들은 말 없는 싸움, 신경전을 벌인다.
이들은 몇 번의 시험을 하지만 포로들은 그 눈치를 채질 못한다. 동래수용소를 건설하는 일을 가까운 곳에 있는 우리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잡역을 맡는다. 배수로 정리하는 일을 비롯한 천막을 치는 일, 철조망을 치는 일을 수없이 하면서 집합된 앞줄과 옆줄을 마음대로 재단해서 가져갔다. 그러니 한 일자리에 나가서 잡담도 하고 수작도 부리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그들로서는 어떻게 하면 손잡고 붙어 다니는 우리의 얽힌 정을 부숴 무너뜨리고 낱으로 만들어서 집단행동을 못 하도록 할까, 하여 고심한다.
역력하다. 경계하는 행동이다.
계획된 날. 또 총을 들고 촘촘하게 이어 붙어서 따라오는 ‘국방군’ 감시병과 함께 이웃에 있는 동래수용소로 이주하게 되는데, 나는 입은 것과 손에든 담요 한 장, 그리고 어떤 사람도 갖지 못한 귀한 보배인 텐트 실 ‘양말과 장갑’이 소지품 전부다. 그러나 참 내 것은 ‘양말과 장갑’밖에 없으니 지극히 단출한 이삿짐이면서도 이 ‘네 짝’을 옮기는 내 심경은 태산 같은 무게의 중력을 느꼈다.
철조망 문밖을 나가는 내가 그대로 이 길로 이 복장으로 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다른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는, 절통한 현실에 무너져 내리는 나를 잠깐 북녘 하늘을 지켜보며 간단히 자위하고 만다.
내년에는 가겠지!
‘양말과 장갑’을 그때까지 잘 보관해야지! 입 밖으론 나오지 않는 짧은 두 마디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