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외통궤적 2008. 7. 1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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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물에 어두운 우리에겐, 닥치는 것 모두, 보이는 것 모두, 들리는 것 모두가 죽음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게 하는, 어제와 오늘이다.

떨고 있는 우리에게 멀리서 총소리가 끊이질 않고 드려온다. 이 총소리는 이상하게 둔탁하여 특별히 죄수들을 사형하는 총인 것이 틀림없다고, 귓밥을 손으로 보태어서 듣고 있으려니 간이 오그라들고 입술이 마른다. 이 소리는 방마다 차례로 쏘아 죽이는 소리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다가 이제는 옆방에서 들린다.

옆방 사람은 죽었고 이제는 내 차례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나를 치마폭으로 포근히 감싸서 다독거린다. 다음 총알을 맞을 사람은 나다.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현장이 눈앞에서 벌어질 참이다. 찰나에 우주가 사라지는 힘, 이 찰나를 영겁의 시간으로 맞는 나, 그대로 나의 존재를 의식하는 엇갈림으로 충족해야 하나? 끝이다. 아니 시작이다. 허무다. 아니 방대무변(尨大無邊) 무한존재의 나로 된다!

문이 열렸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다. 걸음을 걷는 유령의 신세가 아니고 내 볼을 꼬집어서 아픈, 살아 있는 나다.

또 한 날의 새벽도 열렸다.

간수는 우리를 한 줄로 세워서 마당으로 끌어냈고 우리는 다시 트럭에 태워져서 어느 학교 운동장에 줄지어 앉게 했다. 넓은 운동장에는 이미 많은 핫바지, ‘인민군’복 죄수가 쪼그려 앉아 있다. 그들도 죽을 곳,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의 아침 식사가 또 소금 주먹밥으로 배급되고 있다.

한가지 위안. 이 많은 사람이 죽자면 내게도 몇 번이고 더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있겠구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 꾸역꾸역 먹고 있노라니 어느새 운동장 한 귀퉁이에 햇살이 들었다. 햇빛은 긴긴 어둠을 뚫고 가늘게 이어온 나의 오늘, 이 아침에 내 가슴을 꽉 차게 밝혀준다.

운동장 그늘진 곳 한쪽에 여러 개의 책상이 놓여있고 그쪽을 향해서 긴 줄이 이어졌다. 책상마다 한 줄씩 매달려서 다가가고, 그곳을 거친 사람은 또 차에 올려 태워지고 있다. 경비병은 이중삼중 물샐틈없이, 촘촘히 둘러쳐져 있어서 또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을 어디로 싣고 가서 죽인단 말인가? 낙동강 기슭? 아니면 산골짜기? 아닐 것이다. 이들은 우리를 소멸하는 데 많은 자원을 낭비하질 않을 것이다. 도대체 이들의 속셈은 무엇인가? 또 절박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 나온다. 난 그토록 궁금한 게 많았다.

줄을 따라가려니, 어느새 내 앞에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얼굴이 다가왔다. 얼굴은 희고 구레나룻이 새파랗게 깎여진 일본인이 군복을 입고 나를 심문한다. 책상은 군용이 아닌 듯, 적황색의 반짝거리는 나무 책상에다 천으로 입힌 의자 바닥이 제법 고급스러워 보였다. 아마도 학교 비품인 듯싶다.

‘부따이 메이와?’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으로 보아 나를 매우 측은하게 여기는 듯했다. ‘부대명’을 묻는다. ‘와까리마센.’ 난 알지 못하는 사실, 그대로 대답한다. 다시 내게 묻는다. ‘도꼬에 쮸돈시데 이다까?’ 주둔지를 묻는다. ‘니시 다이뗀데스’ 서 대전이란 내 대답에 그는 익히 아는 것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잡힐 때의 무장 상황과 잡힌 장소와 잡힐 때의 부대 상황을 묻는다. 난 아는 대로 대답했다. 이것이 전황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비무장 군인’의 치욕을 오히려 호소하고 싶다. 무장 했던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향길에 접어들었을 것이라는 억울함이 폭발한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들이다.

내게 운명 지어진 것은 이것뿐이다.

우리가 탄 트럭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한국 사람이, 아니 ‘국방군’이 배치되어 우리를 엄히 다스리고 있다. 그들의 군복은 미국 군대의 복장과 다름없는 군복이다. 군복은 군인의 표상이다. 아직은 미군의 휘하에 있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가 탄 트럭이 앞차의 꼬리를 물었다.

맑고 밝은 이 아침에, 우리 죽음의 검은 길은 트럭 행렬로 시작되어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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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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