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청주 시내를 뚫고 한적한 어느 곳을 달리더니 높은 담 처진 곳으로 들어갔다.
육중한 문이 열리고, 나와 ‘중의적삼’을 입은 또래 한 명과 ‘인민군’복을 입은 팔 부상자 한 명, 셋이 한 방안에 등 떠밀렸다. 이윽고 꽝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면서 이내 쇠붙이 소리가 났다. 비로써 우리 셋은 낮은 목소리로 서로의 처지를 묻고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전망해 보기도 했다.
비릿한 피비린내를 맡으며 변기에 쪼그리고 앉는 나를 우리 부모가 상상이나 하고 계실까? 우리는 이곳에서 사형 집행 절차를 마친 후 차례로 이승을 마감해야 하는 것을 단정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서 형장에서 사라졌을 터이니 우리도 그 절차의 한 매듭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어릴 때 아버지의 훈계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쁜 짓을 하면 콩밥을 먹는다!’
‘왜 콩밥을 줘요?’, ‘?’,
난 나쁜 짓은 안 했으니, 콩밥은 안주고 흰밥만 줄까?
잠시 치기(稚氣)의 생각도 스쳤다.
오늘 밤이 무사하길 조상님께 빌 뿐이다.
팔을 벌려서 두 발, 사방너비에 변소가 차려져 있는 네모꼴 상자 안에 들어있으니, 어디를 보아도 벽, 주사위 통 안에 세 마리 벌레가 되었다. 단지 들어온 통나무 문의 한가운데에 주먹 하나가 드나 들 만한 구멍이 있고 이 구멍이 외부와의 대화 구멍이지만 이 시간, 이 구멍도 막혀있다. 이 구멍은 외부에서만 여닫게 된 것이기에 우리는 마치 저승에서 염라대왕의 부름을 기다리는 사람, 부대 속의 살아있는 개와 다름없다.
이 작은 창구가 열리더니 주먹밥 세 개가 놓였다.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생리 구조가 이런 때엔 한없이 원망스럽다. 차라리 죽음을 앞두고는 먹을 수 없는 구조라면 이런 때에 죽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속이 편할 것이련만, 아마도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짓으로는 할 수 없는 숭고한 신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라서 이렇게 고통스럽지만 먹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살 희망이 있는 징후를 예감하기에 앞서서 아직 죽을 수 있는 절대자의 허락이 없다는 것, 또한 알아야 했다.
생각은 종횡으로 수놓아 간다. 먹는 것이 죽음보다 먼저 들이닥치니 이 답답한 통 안에서 상종할 것은 소금을 찍어 빚은 주먹밥이 우선한다.
화장실 향내, 구더기가 나오는 팔을 움켜 안고 찢어지는 신음으로 죽여줄 것을 호소하는 ‘군복’ 입은 부상자, 이후 어떻게 내 목숨이 없어질지 가슴 조이며 날새기 전에 이밥을 먹어야 한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도 잠시 숨을 돌릴 겨를이 생겼다. 내 목숨을 이 세상에서 없애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어떤 수를 써서 죽이려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일까?
옳다.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우리가 죽어서 묻힐 구덩이도 파 줄 사람이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는 형무소(刑務所), 형무소에서 집행되는 사형수의 마지막 절차처럼 체계적으로, 손쉽게 처리하려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그 어떤 방법으로든 곧 처형되리라!
그래도 죽기 전에 형무소의 맛을 보고 죽으니 내가 이 세상에 나서 새로운 것, 미지에의 동경이 항상 팽배하던 나에게 이나마 인간 세상의 새로운 한 단면을 보게 한 것조차 감사해야 하는 신의 배려 이런가? 나는 젊은 피를 값지게 하려 죽음을 각오하는 한때의 다짐에다 다시 덧칠한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부닥치고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생존의미를 찾고 싶은 욕망이 이제 도리어 생의 애착이 간절한 또 다른 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취급하는 상대는 우리를 한낱 미물로 대할 따름이다. 여기는 옴치고 뛸 수 없는 독방 감옥임에도 세 사람씩 집어넣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인간 이하다.
이쯤 생각하고, 모든 걸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평온하여지고 그동안에 찢기며 갈리며 쌓였던 몸과 마음의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쪼그린 채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