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복자

외통궤적 2008. 7. 17.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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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빽한 잔솔가지를 헤치고 엎어지고 미끄러지며 산마루에 올라섰다. 아래에 보이는 상황은 등 뒤의 평화로운 세상과는 판이하다.

우리는 한동안 애송 무더기 뒤에 몸을 숨기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산밑을 바라보았다. 깊은숨을 들이키고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아찔했다. 다시 침착하게 솔포기에 몸을 감추고 뚫어지게 내려다본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모두는 내 행동을 신호로 움직인다. 이들은 단순히 혼자 행동하는 것보다는 무리 지어 행동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러니 적절한 대응이 튀어나올 수가 없다. 일행은 말은 없어도 내가 무언가 있기에 저렇게 행동하지 않겠냐는 막연한 생각에 차 있을 뿐이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얼어붙은 것처럼, 요지부동으로 앉아 눈알만 굴려댄다.

잠자리 모양의 정찰기가 내릴 듯이 낮게 떠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며 날개를 기울여 선회하고 있다. 모든 게 하나같이 검고 칙칙한 색깔을 입히고 있어서 풀 섶에 사뿐히 앉아도 알아볼 수 없을 만치 산 아래 모든 풍물과 그 색이 닮아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올라가는 탱크와 장갑차, 그 뒤를 무섭게 생긴 흑인들이 눈 흰 눈자위를 드러낸 채 육중한 장비를 갖추고 길 양 갓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 우리가 ‘황주’에서 내려오든 모습과 대오는 비슷하나 갖춘 장비와 행동은 전혀 다르다. 당당해 보인다. 한낮에 이동하며 중무장한 보병이 그렇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그렇고, 가득가득히 실은 병기는 우리의 기를 혼절하게 할 만하다. 우리는 남에게 알리려고 울긋불긋하게 칠하고, 붙였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땅 그 자체가, 대지가 움직이는 듯, 지구의 요동에 버금가는, 대 자연의 변화 같다. 어찌 감당하랴!

아직 나는 실전을 경험하지 못했다. 움직이는 부대를 보지 못했다. 고작 일본군의 훈련을 먼발치서 보았고 소련군의 우리 동네 주둔을 보았을 뿐이다. 또 내가 있는 ‘인민군’의 훈련을 보았으나 모두가 정지된 상태거나 훈련, 이완되어 해이한 상태의 심신을 생각하는, 그런 선입견으로 보아온 터라 눈 아래 펼쳐지는 살기등등하고 피부가 터질 것 같은 긴장과 팽만한 압박감은 내 생전에 경험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목숨이 이들에 의해서 이어질지 끊어질지를 모르는, 절박한 매 순간을 겪고 있기에 그렇다.

최대의 무기는 흰 ‘중의적삼’, 이 밖엔 아무것도 없으니 내 쪽의 방어 수단은 티끌만치도 없다. 그러니 온전히 저들의 심경에, 저들의 손끝에서 간질거리는 쇠붙이 방아쇠의 일 센티미터도 안 되는 움직임에 우리의 심장이 뚫리느냐 온전하냐다. 비록 한순간을 넘겼더라도 우리의 생명은 다음 경각에 새로 직면하는 죽음의 연속적 순간 이음에 매달려 있다.

저 넓은 길을 무슨 수를 쓰든지 건너가야 하련만 어떻게 건널 것인가? 믿을 것은 백의종군(?) 흰옷뿐이니 이 흰옷에다가 총을 겨누고 불을 뿜을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체, 넘길 것인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비록 ‘중의적삼’이지만 가는 곳만은 뚜렷한 ‘떨어진 별’들의 집이다.

한 단위 부대가 진군하는데 한 식경(食頃)쯤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하늘도 한길도 비어있어서 먼지만 뽀얗다. 때를 만난 어미 새가 둥지를 향해 나르듯 솔가지를 잡아 젖히고 밑으로 내달으니 모두 따라서 내려온다. 그들의 판단이 달라 머뭇거리거나 뒤로 뛰었다면? 그래도 나는 홀로 계속 밑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런 낌새를 나머지 일행이 알고 있기에, 그래서 그들이 따르는지 모르겠다. 죽음의 길로 가는지 삶의 길로 가는지 판단할 겨를이 없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를 따라 움직이기만 하니까! 그럴 수밖엔 없다. 나 홀로 대담한 몸놀림에 그들은 반사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난 움츠리고 다시 솔숲에 숨었다. 일행도 따라 했을 것이다. 적이 내 시야에 들기 전에 행동하기란 정보가 없으니 불가능하고, 언제나 적군이 나타났을 때 몸을 피하는 지극히 소극적인 행동이다.

다시 정찰기가 떠서 길을 따라 떠 가고 땅 위엔 새로운 기갑부대가 진군하다가 끈기면서 한동안 뜸했다. 난 또 홀로 터덜터덜 내려갔다. 한 대의 트럭이 서서히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그 속에 타고 있던 흑인 병사들이 우리 쪽을 올려다보면서도 아무런 반응 없이 그 속도로 올라갔다. 나는 승리의 순간을 맞았다. 그것은 적들이 우리를 보고 농사꾼으로 오인하길 바랐든 내 생각이 적중했다는 것 때문이다. 나는 멈칫하다가 뜸한 이 기회를 놓칠세라 그대로 한길을 향해서 내려가서 한길 위의 산기슭에 머물러서 이제 발아래 신작로로 내리 딛으려고 두리번거릴 때다.

언덕 밑에서 새까맣게 생긴 대여섯 명의 병사가 일시에 일어서며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무어라고 외친다. 적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우리를 꿰뚫어 보는 눈의 흰자가 고정되어 유난히 크게 보인다.

가슴이 서늘했다. 이제 내생은 끝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커다랗게 다가왔다.

‘홀덮!’ ‘홀드엎’. ???. 나는 석고상이 돼 있었다. 그러나 내가 죽는 순간을 맞아 혼을 잃었다가 어떻게 죽는가를 알려고 다시 기를 쓸 때, 흑인 병사하나가 나머지 다섯의 호위 하에 우리에게 다가오며 그의 총을 들어 부리를 하늘로 향하여 올렸다. 그러면서 ‘홀드엎!’을 반복한다. 인류 공통의 수화? 나는 손을 번쩍 위로 들어 올렸다. 미군들은 우리를 향해서 각각이 하나씩을 맡아서 겨누고 나머지 한 병사는 우리의 몸을 수색했다.

당연히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아끼든 돈은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우리는 뒤에서 겨누는 총부리를 의식하며 밀려서 한길 가로 내려섰다. 그리고 그 미군들은 우리를 자기네가 가는 반대 방향으로 한 줄로 세운다. 여전히 손은 머리 위에 올려져 있다.

내 머릿속이 번쩍였다. ‘옳다, 한 줄로 세워서 보기 좋게 길가 구덩이에 처넣으려는구나’. 내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고 있어도, 나는 여전히‘생각’하고 있으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모르겠다. 이상하게 내 뜨거운 피가 분출되질 않는다. 그렇다고 남의 비명이 들리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나에겐 온갖 아름다웠든 과거가 번쩍이며 지나갔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죽음의 차례가 오질 않아서 뒤돌아보았다. 험상궂게 생긴 흑인 병사 둘이 길 한쪽에 나란히 세운 우리를 향해서 총을 겨누고 서 있으면서 묵묵부답이다. 무어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못 듣고 몰랐으니. 그가 우리보고 다시 할 말인들 있을까, 만은 총부리를 우리에게서 떼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죽는 장소와 방법 시간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죽이고 죽는 전쟁터, 우리가 아무리 변장했다고 한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몰골은 영락없는 적의 패잔병이니 죽이든 살리든 온전히 그들의 몫이니깐 저항할 힘이 없는 우리의 죽음, 받아들이는 것은 순

리인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 두 병사는 총부리를 내 등 뒤에 대고 지긋이 밀고 있다. 소리가 들리질 않는다. 불을 먹는 뜨거움도 없다. 등 뒤의 총부리에 눌려서 한 발짝 앞으로 디뎠다. 또 밀고 있다. 다시 한 발짝 내디뎠다. 이러는 것이 반복되면서 한 줄로 선 우리가 앞으로 걷게 되었다. 이제 죽을 장소로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죽음의 행진이다. 역으로 북진하는 탱크와 장갑차들을 뒤로하며 얼마를 이같이 한 줄로 걸었다.

도로 가의 나뭇잎이 몽땅 회색으로 물들어 있다. 추석의 둥근 달을 향해 몸 씻을 이슬을 갈구하고 있다. 내일 아침엔 밤새 내린 이슬이 단 한 포기의 풀이라도, 그도 어려우면 단 하나의 잎이라도 맑고 파랗게 씻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죽음의 발걸음은 이어졌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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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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