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존재하는 모든 건 끊임없이 변화하되 두 가지 원형으로 나뉘어서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그 하나는 자신의 정체를 뚜렷이 드러내어 관계있는 사물과 구분되어 필연 내지는 우연적 결합 분리로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은폐(自己 隱閉)로 들어내지 않음으로써 외형과 가시적 변화의 조짐 없이 변화하는 것일진대, 우리 인간들도 이 범주를 벗어나질 않는 것 같다. 그러함에도 우리 인간은 왕왕 이 범주를 넘나들며 벗어나려 든다. 어쩌면 그래서 신의 노여움을 사는지도 모른다.
나도 존재하고 있으니 어느 경우를 택해서든 변화하여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하여 심신을 한 점에 모아서 그 하나를 고른다.
이제 나는 북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여기는 적지, ‘청주’에서 ‘공주’로 이어지는 오지의 오솔길 어딘가에 서 있다. 내 행로를 정하여서 움직여야 한다. 그러려면 이런 군복을 입고서는 적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과 생명 보존의 자위적 발동이 나를 본능적으로 변신의 유혹으로 이끌었다. 해서 제안했다. ‘우리 변장을 하자.’ 저쪽 마을에 들어가서 농군으로 변하자. 그러자 의기투합한 또래의 ‘소년병’ 일단 다섯은 그대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네로 향했다. 논두렁길을 따라서 질러 들어갔다. 가까운 집부터 집집이 흩어져 각자의 수완대로 회유나 협박할 참이다.
내가 들른 집 주인은 오십쯤 되어 보이는 점잖은 아저씨다. ‘우리는 보시다시피 이제 집으로 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으려면 이 복장으로는 한 발짝도 옮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옷 한 벌과 보자기 한 개와 신 한 켤레를 내주십시오.’ 가히 명령조로 들이대는 어린것에 대해서 그 어른은 한마디의 토도 달지 않고, 준비했다는 듯이 즉시 내왔다. 그러면서 ‘신발은 없어’서 줄 수가 없단다. 아저씨의 현명한 판단은 옳았다. 만약 거절한다면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모르리라 여기지 않겠나! 비록 비무장이지만 배후가 어떻게 포진해 있는지 모를 일이니까.
많은 의복을 달라고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쉽게 중의와 적삼을 얻어낸 나는 가든 길의 갓으로 와서 갈아입기 시작했다.
변장하는 내 마음은 찢어졌다. 나를 위장하고 나를 말살하는 행위기에 서글프고, 볼품없는 색깔로 바래기는 했어도 나를 감싸서 이곳까지 데려온 옷, 상징적으로나마 내가 속한 집단의 표상인 ‘군복’을 버리고 머슴으로 되어 가는 내가 초라했다.
겉옷을 벗었다. 초가을의 새벽공기가 습기를 머금고 살을 후볐다. 양손을 어깨로 들어 올리면서 속옷의 허리끈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허리춤을 잡아 올리며 생각한다. 속옷은 입어도 밖으로 드러나질 않으니 어떠하랴! 싶어서 그냥 동여매고 말았다. 이어서 위 속옷도 고름을 조여 매어 속옷 매무새를 고치고 중의적삼을 그 위에 덧입었다. 내가 내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망정이지 영락없는 허수아비일 테다. 이제 바로 명과 실이 딱 들어맞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움직이는 허수아비다. 벗어 던진 군복을 한번 내려다본다. 어깨에 달고 다니든 견장은 한낱 어릴 적 병정놀이 때의 ‘별 딱지’보다 못해져서 한숨이 길어진다. 머리를 들고 사방을 훑는 내 몰골을 보기 싫은 하늘의 별은 이미 숨어버린 뒤였으니 난 부끄럼 없이 움직일 뿐이다.
삼베 보자기에다 바랑에서 꺼낸 ‘한국 은행권’을 돌돌 말아서 허리에 질끈 동여맸다. 이로써 나는 먼발치에서 본다면 농군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머리에 쓸 모자가 없는 것이 흠이다. 모자는 밀짚모자라야 할 텐데 구할 수가 없었다. 차츰 해결할 방법밖에 없다. 이 변장의 모든 절차는 순조롭게 끝맺었다.
초가을의 새벽에 떨어진 ‘양철별’들은 길바닥에 지천으로 깔려서 하늘을 향해서 반듯이 누웠고 우러르든 휘하 병사들의 지나는 발굽에 짓밟혀 이겨지며 압살되고 있다.
이 아침의 처참한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는 하늘의 별들이여! 해 뜨는 대명 아래서 측은하게 밟히느니 차라리 함께 거두어 햇빛으로 가려주시구려! 그리하여 새로이 변화된 한 인간으로 탄생시켜서 존재의 의미를 갖게 하소서!/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