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곳

외통궤적 2008. 7. 1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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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0.010709 안전한 곳

동쪽 하늘은 밝아오나 희망의 빛은 우리에게 다가오질 않았다.

곧 우리의 여명은 하늘에 떠밀리어 힘없이 증발해 버렸다. 아니다. 땅속으로 잦아들었다. 날이 밝기 전에 무엇이든 결단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전위(前衛)부와 지휘부는 이미 괴멸되어 나름의 각개행동에 들어갔다.

내가 되돌아와서 우리의 ‘중의적삼’ 부(분)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다음 내 입에서 흘러나올 소리에 희망을 기대하는 눈치다.

그러나 내 말은 그들의 기대를 무산시키고 피를 역류시켰다. 이미 내가 겪은 바대로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훈련하러 ‘안전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미 적들에 의해서 차단되고 우리는 포위됐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별도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일러둡니다. 이 시간 이후 여러분은 자유로이 행동하여서 우리가 가야 할 곳, 북으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시는 해도 나조차 황당하다. 포위됐다면서 어떻게 북으로 가라는 것인지 무슨 수로 뚫는다는 건지, 도무지 허황하기만 하다.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하여 어정쩡하게 말은 해놓고도 약간의 토를 달지 않으면 내가 조금 전에 느낀 그런 상사의 무책임한 명령에 상했든 마음의 일말(一抹)을 이 ‘바지저고리’들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해서, ‘여러분 중 나를 따라갈 사람은 나를 따라와도 좋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양심의 선언으로 생각하고 거침없이 외쳤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바랑에서 돈을 꺼내어 한 다발씩 건네주었다.

그들, 또한 평생 보지 못한 돈뭉치인지라,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이 행동은 무척 당돌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돈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그렇다. 상황을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위치의 내가 여기서 주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모든 건 뒤에 판명되리라는 기대가 나를 용감한 행동으로 끌어들였다. 바랑은 홀쭉해졌다. 돈을 받아 든 ‘중의 적삼’들은 하나둘씩 흩어져서 저들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서 무슨 말을 할까? 그들은 실망하거나 절망할까? 아니면 반겨서 길길이 뛰어 춤을 출까? 오늘 이 한 토막의 때와 때 사이를 이으며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희비가 엇갈려 다를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며 상호 보완의 절대적 가치이다. 나도 어느 한 편으로 기울지 않으면 이 한순간을 잇는 살아있는 인간의 축에 끼질 못할 것이다.

자,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적을 향해서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잡혀서 죽을 순 없다. 만약 총이 있다면 죽어서도 후회 없을 용맹을 떨쳐 세상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 나뿐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같은 입장의 많은 또래는 이제 각자의 의향을 개진하나 묘책은 없다. 같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 서로의 아픔을 달래야 하는,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면서 주저하지 않고 고향으로 달려가는 ‘중의적삼’들의 발걸음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숙명은 누구의 탓인지를 따질 겨를이 없이, 날은 점점 밝아온다.

대밭에 엉겨 붙은 초가에선 아침 연기를 대밭 속에 피워 내고 있다.

평화의 마을, 한쪽 구석에서 존귀한 생명이 그 명멸을 점칠 수 없어서 망연자실.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여기는 고향으로부터 천 리를 두고 있는 무연(無緣)의 ‘적지(敵地)’가 아닌가! 이제 내가 살아남아서 갈 수 있다면 먼저 해야 할 짓, 아버지와 어머니께 사죄하는 순서이다. 그러나 이것도 살았어야 할 수 있다. 내겐 생존의 목적 외엔 아무것도 없다. 해서 모든 수단을 삶,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할 뿐이다.

어제가 추석, 오늘은 못다 한 성묘를 차근히 챙겨 들르거나 친척끼리 행사를 치르려 왕래가 잦은 날이지만, 장터같이 들끓는 여기 길바닥에는 토착의 그림자가 얼른거릴 경황이 없다.

추석은 이 땅 위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모든 날 것들 것이 되어버렸다. 비행기 굉음이 하늘을 가득 채워서 지상의 모든 걸 위압하고 있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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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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