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자

외통궤적 2008. 7. 1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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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7.010701 이탈자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보자기로 덮은 함지박을 이고 연신 밥과 국을 나르며 행주치마를 매만진다. 져들 끼리의 소리 없는 말이다. 또 동네의 구장 반장은 행여나 불상사라도 나면 어쩌나싶은지 하루 종일 윗말 아랫마을로 하릴없이 오르내리며 그들만이 아는 눈짓으로 정보를 교환하며 스쳐지나 다닌다.

 

우리가 이 동네에서 머무는 비용일체를 문서로 증명해주며 얼린다고 하드래도, 언제 아무데에 가서 신청하면 틀림없이 밥값과 고기값을 받을 수 있다고 보장 한다 하드래도, 그 종이쪽지만을 믿고 밥을 주고 잠을 재워주며 시중을 들어줄 마을 사람들이 아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화가 자기들에게 미칠지 모를 판국이니 이판이 걷어지기 전에는 손해가나든 덕이 있든 함께 따라 움직이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익히 아는 터다. 그래서 묵묵히 대세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훗날에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순탄하고 무리 없기를 바라서 이렇게 고분고분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흰옷 입은 사람끼리 통하고 누렇게 바랜 군복을 입은 우리끼리 통하는, 어쩌면 숙적의 오월(吳越)이 배아닌 같은 동네 같은 집에 머물면서'동숙同宿)'하며 다음기회를 기약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엊저녁에 다섯, 오늘오전에 셋, 해서 모두 여덟 명의 중이적삼무리가 배속되어 나와 함께 산 밑의 작은 집 사랑채에서 먹고 자는 식객노릇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나이와 용모를 섞어서 눈여기고 이름을 덧붙여서 그들의 신상을 가늠해보려고 묻는 몇 마디뿐이다. 그들의 옷은 맞춘 듯이 바지저고리요 고무신이다. 어느 고을 부잣집머슴인지 몰라도 꽤나 정갈하게 지어 입힌 열두 새 삼베 중이적삼이 돋보이고 그 위에 황포 조끼까지 입고 있는, '나주'에서 왔다는 아저씨는 모름지기 주인의 각별한 부탁으로 여기까지 나왔음직하다.

 

 

집집이 뽑아 가는 ‘의용군’, 지역의 열성당원의 성화에 못이겨 면피용으로 아들 대신 보낼 요량으로 사랑방에 마주 앉아서 호롱불심지 돋아가며 저녁 내내 타일렀을 것이다.

 

‘갔다 오랑께? 그때 잊지 않을 것일세, 왜있지 않은가 이? 쬐꾐 멀긴 해도 잉? 저어기 수로 끄트막시 팍 꺼져버린 논 한 배미 말일 씨, 죄다 줄것잉께 가서 니 재주를 부려버려! 아 그러면 자네가 갈든 땅인디 어째피 남한테 갈텐께로 그전에 자네가 갖이믄 쓰지 않겠는가뵈, 쓸만한 논이랑깨.’

나는 상상의 살촉에 깃 날개를 달아 순식간에 전라도 나주 고을로 가서 이 머슴의 주인 집안을 둘러보고 왔다. 건장하고 훤칠한 키가 고을의 머슴 중에 상머슴임을 알 수 있다. 이 머슴은 다른 머슴들보다 유독 말이 없었다. 그는 조카 같기도 하고 아들 같기도 한 어린나이의 나를 상전으로 모셔야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서 고뇌하고 있을 것이다.

 

 

이 머슴아저씨와는 정반대의 입장도 있다. 꾀죄죄하게 때 묻고 축축 늘어져서 실룩거리는 올 새 중이적삼을 입은 한 패의 다른 이들은 신이 난 듯이 알아듣지 못할 사투리로 떠들며 진종일을 신나게 보내고 있다. 그들은 생각하리라. 지금쯤 주인집에 있거나 품팔이로 하루살이 하는 우리네가 이 바쁜 철에 이렇게 한가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들일도 아랑곳없고 소먹이도 외면하고 비가 온들 새끼 꼴 일이 어디 있으며 주인집 아들 거드름 거리고 대문 심부름시키는 꼴 보지 않아서 살이 절로 찔 것 같다며 희희낙락하고 있으리라.

 

이들은 모두가 진실로 변화를 갈구하는, 사막에서 길 잃고 방황하며 목타던 갈증에 빗줄기를 만난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일단의 저항 의식의 배아가 묻어 있는 한계인인 것이다. 해서 그들은 오히려 떨어진 발싸개와 광목쪼가리 속옷에다가 누렇게 바래서 흰 빛마저 비치는 나의 '인민군복'을 보고 반겼을 것이고, 한 줌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소년병에게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끼고 도우려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동병상련의 자기위안에 쾌재 하는지도 모른다.

 

 

긴 여름날 점심후의 일과는 당연히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집안이나 집 언저리 마루에서 자거나 골목어귀 그늘진 곳에다 금 긋고 풀잎과 조약돌로 고누놀이를 하거나 두렁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실로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그 밖의 낮 한때 시간에는 군가를 배우는 것이 일과의 전부이다.

 

나도 한숨을 자고 일어났다. 늘 휘하(?)의 중이적삼대원을 살피고 파악하는 무의식이 발동하여 두리번거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의 말끔한 중이적삼 위에 황포 조끼를 입은 이가 보이질 않는다. 변고가 있음을 직감했다.

 

나주아저씨가 아예 사라졌는지 무슨 연유로 잠깐 어디에 들렀는지 알아야 되겠기에, 상황을 파악해야 대처가 되겠기에, 조용히 수색을 한답시고 배속된 핫바지 조고리들과 함께 샅샅이 뒤져 올라갔다. 마을 지나 산으로 올라갔다.


소나무 숲 속과 잔솔포기마다 헤집고 뒤졌으나 찾아낼 수 가없다. 수색범위는 점점 넓어져 갔다.
우리가 묵고 있는 마을에서 한참을 벗어나서 철길이 내려다보이는 등성이까지 올라가 보았으나 허사였다.

 

 

대원들,아니 바지조고리무르를 되돌리며 한참 침묵했다. 풀죽은 나를 보고 무슨 위안이라도 하고 싶어서 멈칫거리는 그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원해서 그들의 한을 대신 풀어줄 대리만족 대상으로 우리를 찾은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기에 행동을 통제하질 않았다. 내 과실을 엄히 문책 받는다는 생각을 하니 오금이 저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이미 해는 서산에 뉘엿거리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알리는 것이 상책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 발길은 동네 어귀에 있는 중대본부로 향했다. 달은 몸은 날듯이 다리를 저었다. 달음질로 마을 어귀에 닿았다. 직속상관에게 보고하는 내 자세는 진지했다. 어떠한 처벌도 받겠다는 자세이니 말이다. 허긴 다른 묘책이 없으니 외곬의 길이다.

 

 

그런데 그냥 알았다는 것으로 나를 되 돌려보낸다. 이상도하여라! 아무리 오합지졸 같은 군대지만 사람이 없어졌대도 그만인 군대를, 작은 내 머리로 아무리그려도,비상식으로라도 이해되지 않는, 무언가 조짐이 이상한 예감마저 들었다.


이후, 나의 임무는 다했으니 이번에는 처벌이든 면책이든 무슨 기별이 있으리라는 초조함만이 온통 나를 압박해서 숨 막힌다. 저녁은 먹는 듯 마는 듯, 밥맛이 없었다. 내딴에는 이것이 전선에서 겪는 최초의 경험이다. 독자적 판단과 행동으로 시간과 공간과 자원을 재단하는 일대 파격이었다.

 

달은 가득하여 천하를 구석구석 밝히는 초저녁에 전령이 왔다. 나를 부르는 연락병의 얼굴이 암울했고 서둘렀다. 나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고 무서웠다. 동시에, 제재의 칼날이 목젖을 겨누는 짜릿함이 있었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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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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