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단된 퇴로

외통궤적 2008. 7. 1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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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9.010708 차단된 퇴로

골목골목에서 몰려나온 ‘중이적삼’들이 점점 불어났다. 흰 바지저고리들은 도로의 너비가 좁으면 좁은 만큼 넓으면 넓은 만큼 차서 빽빽했다. 그러더니 어느새 두 줄 행렬이 되면서 길게 이어졌다. 이동 행렬은 질서 있게 서북쪽으로 끊임없이 뻗었다.

집짐승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질 않는다. 보름달이 밝아서 달 보고 짖는 개도 있으려니, 오늘은 팔월 한가위임에도 개들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적막에 호소한다. 개를 좋아하는 부대의 이동을 바라보며 개도 제게 미칠 화를 오히려 걱정하는가 보다. 어쩌면 개들은 짖고 짖다가 끝도 없이 이어 걸어가는 떨어진 ‘양철별’들에 오히려 지쳤는지, 짖고 짖다 목젖이 부어서 소리를 못 내는지, 길가의 모든 개는 없는 듯 조용하다.

‘하얀 옷’의 우리 부대는 새벽녘까지 산 밑을 후벼 돌며 개울을 끼고 다리를 건너며 걷고 또 걸었다. 서북으로, 서북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시골의 초가가 나무 그늘에 파묻혀서 조용히 낮게 엎드려 있다. 지상의 모든 생물이 얼어붙은 듯 고요하다. 가라앉은 만물은 달빛에 숨죽어 있다.

별과 달이 어울리는 한가위의 달밤은 예전의 일로 되어 버렸다. 이제까지 ‘지상의 별’들이 하늘의 별을 이끌고 이곳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추석을 고비로 지상의 ‘많은 별’들조차 하늘의 별을 움직이질 못했다. ‘지상의 별’들은 하나둘씩 그 빛을 잃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별들은 숨어서 조용히, 떨어지는 지상의 별들을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다.

뒤처지는 ‘진짜 인민군(?)’이 하나둘씩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부상(負傷)하고 있다. 그들의 다리는 풀려있다. 아무렇게나 걷다가 쉬다가 앉았다가 누웠다가, 마음 내키는 대로, 시간의 제약도 없고, 멀고 가까움도 없이, 가야 할 곳도, 찾지 못하고 오라는 곳은 더더욱 없는, 죽음의 걸음걸이를 반복할 뿐이다.

어쩌면 그들의 의식 속엔 어머니의 치마폭이 아른거리다가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실 하얀 옷의 부대이동은 애초부터 엉클어졌다. 남으로만 가던 그동안의 방향을 우회하여 갈지(之)자로 헤매기 시작한 지 하룻밤을 지나지 못하고 급기야 최후를 맞는 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명령계통은 아직 살아있다. 행렬은 휴식을 핑계 삼아 도로의 양옆을 하얗게 줄 긋고 있다.

모자를 벗은 사람, 신을 한 짝 벗어버리고 절뚝거리는 사람, 총을 멘 사람 아예 총을 지팡이로 삼고 가는 사람, 형태의 다양함은 일부러 꾸미려 해도 꾸밀 수 없을 만큼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든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그 ‘귀(?)한 별’들이 길바닥에 내 깔려있다. 이들로부터 싸우고자 하는 패기의 눈빛은 찾아볼 수 없고 그냥 남이 움직이니까 따라 움직이는 의식 없는 행동이 이어질 뿐이다. 그들이 들려주는 소리는 절망적인 소식뿐이다.

삼삼오오 수군거리다가 그들의 의견이 종합되었는지 또 어디론가 산으로 들로 흩어 들어가는 떼거지 모양이다.

우리 부대는 모든 ‘지휘관’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중대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안전한 곳’으로 가는 길이 이미 차단되었으니 각 단위 부대는 ‘형편에 맞추어서 행동하여 북으로 가’라는 한마디다. 어린 내가 판단해도 너무나 무책임하고 자기의 책무를 망각하는 행동 같았다.

또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생각이기에 앞서 잠재된 의식의 순간 표출이다. 어릴 때 병정놀이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다.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까지 군인답게 행동해야 하는데, 오합지졸만큼도 못한 지휘부를 원망도 해보았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한다면 이 결정은 옳았다.

우리의 형편, 옷만 황록색의 옷을 입었을 뿐 갖추어야 할 기본 장비가 전혀 없는, 허수아비 군인들이고, 게다가 우리가 이끄는 졸개는 한 시간도 훈련받지 않은 ‘중의적삼’을 입은 머슴살이 농군일 뿐이니 차라리 그들 소수의 권총 찬 ‘떨어진 별’들이나마 살아남으려면 거추장스러운 졸개를 떼어 내버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코흘리개들의 병정놀이만큼도 못한 어른들의 병정놀이에 ‘다 자란 코흘리개 병정’의 마음에 들질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발길을 돌려서 내가 인솔해야 하는 ‘중의적삼’ 부대로 가면서 잠시 여러 가지 결심을 해야 하는 순발력이 필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적의 조치는 무엇인가? 내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은 내가 혼자 해야 하고 머뭇거릴 짬도 없이 결정해야 하는, 막다른 점에 와있다.

그러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생사의 갈림길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직감했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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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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