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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통궤적 2008. 7. 15.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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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행군 명령이다. 목적지는 ‘안전한곳’이란다. 이 안전한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황해도 ‘황주’부터 지고 온 바랑 주둥이를 벌려서 한껏 집어넣도록 독려한다. 이것은 한국은행권 다발이다. 돈! 나는 이때까지 이렇게 많은 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만지기는커녕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내가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가 속해있는 부대의 보급을 스스로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가 속해있는 부대의 철수를 돕기 위해서, 한국 은행권을 수송하는 부수적 임무도 받은상 싶다.

 

신권인 이 은행권은 손이 베어질 듯 새파랗게 날이 서있었다. 정교히 다듬어진 한 장의 널빤지 토막 같다. 빈 틈새 없이 맞붙은 낱장이 금속성 질감을 느끼게끔 빳빳하다. 너무나 많은 돈이 손안에 드니 돈인지 돌인지 전혀 실감나질 않는다. 돈의 희소가치란 적어도 현재의 내게는 당치않은 소리가 됐다.

 

상응한 대가를 전혀 들이지 않고 얻어지는 거금을 돈으로써 인정하기가 선득 마음 내키지 않았다. 다만 군인의 신분으로서 어떤 목적에 의해서 우리가 임시 운반한다는 가벼운 생각을 갖게 할 뿐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당장의 현실이 평화시에 생각할 수 있는 척도를 넘었고, 먹을 것도 없으면서 돈이나 짊어지고 배회하는 일단의 마적 같기에, 초겨울 바람에 가랑잎 담 치고 지나가듯 내 머리를 스쳤을 뿐이다.


그러면서 이 돈의 용처나 운반목적지도 일러주질 않으니 더더욱 의혹에 빨려든다. 그리고 다시 까맣게 잊혔던 어렸을 한 때의 일이 또 한 번 번개 치고 지나갔다.

 

구슬을 사고 싶어도 손을 내 밀 수 없었던, 지나치게 어른스러웠던 내 어린 시절, 갖가지 그림이 알록달록 그려져 있는 딱지가 사고 싶어도 가게의 문턱을 일부러 멀리 외면하고 돌아가던 모진 마음덩어리인 '애어른' 나의 짓, 이런 모든 것은 나를 애초부터 돈과 멀게 했는지도 모른다.

 

얼마를 집어넣었는지 알고 싶질 않았다. 그러나 내가 움직이는 몸의 중심을 적당한 무게가 나를 통제하고 발걸음을 적절히 추이는 무게, 군인으로서 몸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허전한 몸으로 네 활개를 젓는 것보다는 훨씬 낳아 보여서 단지 흐뭇했을 뿐이다. 또 급박한 부대의 이동이 이탈자를 두고 탓할만하게 한가하질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그 일은 잊기로 하니 걸음은 더 가벼웠다.

 

 

돌아온 나의 집, 아니 우리 집(?). 우리의 병영엔 중이적삼 아저씨들이 골목을 가득 채우고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중한 처벌을 받을 것으로 알고 있었는지, 모두가 내 곁에 다가와서 후환을 걱정하고 있다. 그 실 그들은 내가 없으면 먹을 데도 잘 데도 없는, 왕초 없는 거지가 되기 때문임을 짐작하고 그만큼만 걱정했으리라.

 

 

추석을 맞은 동네 사람들은 조금 분주히 움직이며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달은 벌써 뒷동산 솔밭 위에 올라앉아서 떠나는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었고 땅위의 별들은 이미 빛을 잃어 숨을 곳, ‘안전한 곳’을 찾는다. 그러나 하늘의 별들은 휘황한 달빛에 더욱 빛나고 있다.

 

서늘한 바람을 타고 익어 가는 가을 냄새가 상큼한 벼 냄새를 버무려서 콧구멍을 자극한다. 아! 얼마나 풍요로운 자연의 손길인가? 잠시 고향에서, 성묫길에 나선 어렸을 때의 나를 회상했다.

 

 

몇몇의 일꾼들만 우리를 지켜 불뿐이다. 땅의 별은 숨것만 하늘의 별은 그래도 또 따라 움직인다. /외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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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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