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외통궤적 2008. 7. 16.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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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끊어진 연이던가? 어미를 잃은 병아리인가? 빈 깡통을 채워서 내다버린 졸개들, 그들은 북을 향해서 원망은커녕 숨 쉴 겨를도 없이 비틀거리고 절룩거리며 북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다.

 

 

끼리끼리 모여서 묘책을 짜내지만 북쪽으로 이동하는 수 외엔 다른 방법은 없다. 발을 잠시도 한자리에 붙이지 못하고 서성이며 좌우로 전후로 훑어보지만 수는 ‘북쪽’밖엔 없으니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래도 두고 온 북쪽고향 하늘을 향해서 가슴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긴다.

 

 

처음부터 바지조고리를 입었던 ‘의용군’아저씨들은 북향을 외면하고 서남쪽으로 뿔뿔이 흩어져 이미 시야에서 모두 사라지고, 그나마 누런 군복이라도 입었던 졸개, 떨어진 별들은 시시각각으로 가지각색의 사람으로 그 모습이 변해갔다. 이들은 하나같이 몸에다가 자석이라도 붙인 것처럼 북으로 또 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삼베 적삼 등허리를 뚫고 드는 바람은 머지않아서 내릴 무서리를 예고하듯 살갗을 축축이 눅이며 스민다.

 

가을바람을 허리에 두른 나는 계절과 함께 목숨의 구걸행진을 시작했다. 우리일단 다섯은 내 또래의 황해도 ‘황주’ 교도대 출신의 학도병 꼬마들로서 의견은 백출하였지만 그래도 뜻은 재빨리 모으는 기민한 점이 있어서 그나마 행동으로 옮기는데 수월했다.

 

더군다나 앞으로의 계획에 의견이 일치했고 어제까지 며칠을 허리뼈가 늘어지게 쉬었으니 다른 패거리보다 민첩하고 시원히 북행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패의 행진은 다른 패들을 앞질러 갈 수가 있었다.

 

 

우리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쳐지면 쳐질수록 생명의 끈은 가늘어질 테고, 적색깃발은 은연중 내려질 것이며 호흡할 공기는 점점 탁해져서 마실 물조차 얻어먹기 어려울 테고, 이제까지와는 상반된 환경에서 거센 모래바람이 덮쳐서 마침내 말라죽을 것이다.

 

여기는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간 한촌(閑村)의 노출된 한길 위다. 어떻게 한 순간이라도 머뭇거릴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아침끼니 잇기를 포기했다. 어디서 어느 만큼의 시간을 허비하며 실랑이를 벌일지도 모르는데, 차려놓은 밥 먹고 가래도 마음 내킬지 모르는 판국에, 새삼 어디에서 아침밥을 짓게 할 것인가!

 

차라리 길을 가다가 길가 집의 어떤 좋은 사람 만나기라도 해서 해놓은 밥을 얻어먹는 행운을 바라는 게 훨씬 낫겠다싶어서, 그런 때가 올 때까지 길을 가기로 했다. 이만큼 조급했다.

 

우리는 대전의 한 농촌마을 주둔지를 저녁에 떠나 밤새도록 걷고 해가 이마를 뜨겁게 내리 쪼일 때까지 쉬지 않고 걸은 셈이다. 간간이 들리는 정보라는 건 이 길을 먼저 지나간 부상자들이 흘린 이야기를 주어 듣는 편이지만 정황으로 보아서 틀림없는 정보다.

 

‘낙동강 전선패퇴’는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인 것이고 그 파장에 우리가 이 모양으로 흩어지고 있다는 것쯤 짐작될 뿐이다. 그때에 이미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며 주둥이가 틀어 막힌 자루 속의 생쥐가 되어 버린 것을 알 턱이 없는 떨어진 별들,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속절없는 것을 눈치 챌 리가 있었겠는가?

 

태양은 누렇게 익어 가는 논배미의 벼를 고개 숙이도록 내리 쬐었을망정 이미 떨어져버린 지상의 별들에 눈짓인들 했겠는가!

 

 

우리는 고립무원의 처지이기 때문에 증발해야 마땅하다. 아니 말살되어야한다. 그러나 사지(死地)에서 몸부림치며 구원의 요행을 바란다. 그리하여 한발자국씩 북쪽으로 옮겨 놓고 있다. 언제 어떤 상황에 놓여 생명이 사라질지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먹는 것은 지극히 한가하고 사치스럽기만 하다.

 

 

이런 생각은 나 혼자만 하고 있음이 판명되는 상황이 닥쳤다. 우리가 한 광산촌을 지나려는 때, 여기에 외지인을 위해 생겨난 음식점이 있어서 우리의 식사를 해결하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그래서 아침을 거른 우리는 짧은 시간에 점심을 해결하고 떠나기로 했지만 일단 주저앉아서 주인에게 식사를 주문하는 과정에서 패가 갈렸다.

 

셋은 있는 돈을 듬뿍 주고서라도 개를 잡아먹고 가자는 의견이고 나와 또래의 또 다른 한사람은 간단히 먹자는 것, 촌음을 다투는 이 시기에 ‘개’같은 것을 잡아먹으며 노닐 한가한 시간이 어디 있냐면서 펄쩍 뛰는 우리 둘의 의견과 나머지 셋의 의견이 대립되었다.

 

모두가 자기네 뜻대로 움직였다. 우리는 즉석에서 식사를 하는 쪽으로, 나머지 셋은 개를 잡아 고아먹는 쪽으로 편이 갈라지고 말았다.

 

 

경각에 달린 목숨을 담보로 식욕에 사로잡힌 셋은 느긋이 드러눕고 있다. 이 셋의 얼굴에는 바로 이곳이 바라든 바를 이를 수 있는 곳이라도 되는 듯이 팔을 고쳐 베고 발장단을 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천도복숭아라도 따는 양 입가가 귀를 향해서 올라가고 있다. 셋은 이 길을 지나는 다른 모든 떨어진 별들 위에 초연히, 차원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 같다. 몸은 우리와 함께 있어도 생각은 전혀 상황과 동떨어진 거동이다. 이들은 붙였든 엉덩이를 떼어 올려서 걸음을 시작하는 우리를 바라보며 의아해 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이 생각하는 것, '그래도 우리‘개’패는 너희보다는 안전하다.' ‘너희는 반드시 후회하리라!’ 발길을 옮기는 나에게 그들의 입김이 귓전을 맴돌면서 나를 끌어 댕기는 힘을 느꼈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내가 개를 먹어본 경험이 있어서, 맛 드린 때였다면 나 또한 그들 ‘개패’에 합류해서 노닥거렸을지 모른다. 아니다, 개도 살고 나도 살자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찾아 스스로 위로하며 걸어간다.

 

 

햇볕은 왼쪽 뺨을 내리 쏘아대고 있다. 봇도랑 물소리가 파란하늘의 하얀 구름을 향해서 굴러 올라갈 때 갑자기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가 나면서 이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삼켜 버렸는데, 어느새 ‘호주쌕쌔기’는 햇빛 속으로 숨어버렸다.

 

 

달포가 넘도록 올빼미 생활만 하던 우리의 얼굴에 정의로운 햇볕이 내리 쬐는데, 이마에 주름이 지도록 미간은 점점 좁아지고, 맨 이마는 별을 떼어버리고 따갑도록 걸어간다.

 

 

그러면서도 당당한 내 태도, 믿음이 갔는지 하나 둘씩 모여서 새로운 무리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내 뒤에 꼬리이어 딸아 붙었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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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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