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고개

외통궤적 2008. 7. 3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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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1.011117 진동고개

길이 없으니 내가 밟고 가는 곳이 길이다. 강한 빛을 받은 동공은 조절되지 않아서 눈부시고, 어둠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칠흑의 장막이다. 가파른 내리막 산비탈에 다리를 헛디디고 곤두박질쳐 떨어지며 나뭇가지에 긁히고 찢겨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일으켜 숨을 고른다. 눈이 아리고 침침하다. 모자는 이미 벗겨져 없어진 이마, 흐른 피가 땀과 범벅되어서 눈썹을 타고 흐른다. 눈 꼬리를 타고 스며든다. 흐르는 피가 볼을 간질인다. 소매로 닦으려고 팔을 들어 올리려니, 손에선 피 방울이 떨어진다. 만신차이가 된 나를 보면서, 새로운 의지를 다진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부터다!’ 총소리는 온산을 울리고 빨간 예광탄은 여전히 하늘높이 날고 있다. 잠시도 머뭇거릴 수 없다! 겨우 직격탄을 피할 수 있을 뿐이지 곧 뒤따를 미군의 장갑차가 눈앞을 가로지른 도로를 달려올 텐데, 일어서야 한다!


곧 일어선다. 또 숲을 헤치며 나무 가지와 함께 출렁이며 내리훑는 나는 이미 미쳐있다. 의식이 있는 한 달려야한다. 정해진 방향이나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니 뛰면서 내가 갈 방향을 빨리 결정해야 한다.


달리기 좋은 찻길이 동서로 발아래 가로놓여있고, 길 건너는 다시 하늘과 맞닿는 시꺼먼 산이 버티고 있다. 나는 평탄한 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냉혹하게 다짐한다. 저 앞에 절벽처럼 가로막힌 산을 넘어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단숨에 찻길을 건너 계곡을 질러 큰 산을 또 타기 시작했다. 죽을힘을 다해 기어오르고 있다.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북쪽인 것이다. 그리고 기동성 있는 미군을 따돌리는 데는 험준한 산이 안전할 것이라는 나름의 판단은 동시에 인내성을 자극하여 기를 샘솟게 하며 나를 변화시킨다.


두 번 다시 붙잡히지 말자! 손은 피와 진흙으로 범벅되고 얼굴은 땀과 피로 얼룩졌으며 옷은 갈기고 찢겨서 살이 들어 난다.


드디어 산등허리에 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암흑의 골짝이 깊게 꺼져있고 그 건너 작은 산 넘어는 아직도 대낮같이 밝히고 총소리를 울린다. 바라보는 저 멀리 장갑차와 헬리콥터의 굉음이 뒤섞이고, 헬리콥터의 조명이 엇갈리고 있다.


간간이 불을 뿜던 장갑차는 갑자기 깊은 골짝을 쪼갤 것같이 쓰러 갈긴다.
요란한 기관총소리가 깊은 골짝을 길게 울린다. 아마 큰길로 들어서서 달아나던 포로들은 또다시 잡히거나 죽었을 것이다.


나는 아찔하여 몸을 움츠린다. 여기까진 성공이다.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그리고 괴로움은 전혀 없다. 다만 살아있는 나를 스스로 확인 할 뿐이다.


눈 아래 물안개가 자욱이 깔리고, 홰치는 닭의 울음소리가 고요를 깨고 있다. 눈앞의 물체가 얼른거린다. 골백번을 구르며 내려온 산이 회색 돌무더기로 보이며 앞을 휑하니 뚫는다. 뒤를 돌아보니 엄청난 돌이 깔려서 내리 덮칠 것 같다. 저곳을 내려왔구나 싶어서 스스로도 놀랐다.
 

동이 트나보다. 잠시 돌무더기에 걸터앉아서 다시 숨을 고르며 생각한다. 주위엔 아무도 없다. 내 몰골을 흘겨본다. 비상식량이며 성경이며 묵주며 깡그리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두 주먹뿐이다. 그리고 단내를 내뿜는 내 숨결뿐이다.

이제 어떻게 하나! 닭 우는 곳을 향해서 조심조심 내려간다. 한 참을 내려가니 냇물소리 맑게 구르는 개울 저쪽, 물안개 자욱한 속에 어렴풋이 민가가 눈에 들어온다. 개 짓는 소리가 시끄럽다. 발밑엔 나무꾼이 다닐 수 있는 외길이 나있다.

홀로, 길 따라 내려간다. 
꽤 넓은 개울, 물소리가 더 크게 들리더니 솔가지가 깔린 나무다리 이쪽으로 웬 사람이 건너오고 있다. 그는 나를 미리 알아보고 있었다. 반가이 인사하며 자기소개를 한다.


자기는 이 동네 이장인데 밤을 새워 당신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며 인도한다.
나는 그를 믿었다. 그의 행동거지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나를 감싸는 격려의 눈빛을 보냈고 내가 안도의 눈빛을 그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연 사람이다.



우리를 감싸라는 행정명령이라도 이었기 때문이리라. 도망자 몇 사람이 모였고, 마을에서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돌아서 아주 구석진 막바지 집의 사랑에서 몸을 사리고,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연달아 해결하며 은신했다.


우리에게 대하는 동네 분들의 세심한 배려는 우리가 편안히 쉬기에 충분했다.  치밀하게, 잘 짜진 보호책(保護策)이 있는 것 같다. 두 번째로 바지저고리로 갈아입을 처지가 된, 반복(反復) 위장을 하게 되는 감회가 새롭다.


‘인민군’복을 벗으면서, 포로의 복장인 미 군복을 벗으면서, 입는 바지저고리가 그렇게 값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바지저고리는 생명을 낳는 거푸집이요, 천으로 된 허리띠는 생명을 잇는 동아줄이며, 밀짚모자는 생명을 빛내는 휘장이기도하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잃어버린 묵주와 성경책이 못내 아쉽고 허전하다. 그 높고 험한 산에 어느 누가 무엇 하러 올라가서 수습할 것인가?


영영 묻혀서 본래의 '말씀'으로 되돌아 갈 것인지, 내 혼이 깃들었던 조각이나마 영감(靈感)받은 나무꾼에 의해서 다시 말씀으로 되어 세상을 비출 지, 나는 손 모아 나무꾼을 보낸다.


땅거미가 지면서 개구리의 합창이 밤하늘의 별을 불러 모으다가 이따금씩 합창을 멈추고 별과  어울린다. 나도 어울린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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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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