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

외통궤적 2008. 7. 2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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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7.011112 함성

‘휴전’, ‘포로교환’이란 생소한 낱말이 들리면서부터 우리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여기 마산의 서쪽 바닷가 한 귀퉁이에 자리한 좁은 골짝에도 봄바람이 불어 포로도 봄을 맞는 싹이 트이는가보다.

 

 

발원지는 시내다. 시위대가 동쪽 고개 밑까지 밀고 왔는지, ‘와와’ 함성이 산을 넘어 들려온다. 심각한 현안이 있는가보다. 시위대는 우리가 있는 수용소 골짝으로 들어오는 고갯길을 넘지 못하고 그대로 진압되고 말았다. 애꿎은 포로들만 영문을 모른 채 설레게 한다. 우리를 적대시한 시위인지, 우리로 인하여 발발한 전쟁책임이라고 밀고 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이튿날, 이 의문은 바로 씻어졌다. 날이 새고,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는 포로의 봉사간부(?)들은 언제 준비했던지 흰 머리띠와 작은 태극기를 잔뜩 풀어내고 있다. 모든 것이 준비된 듯싶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좁은 마당에 빽빽이 모여서 일장의 선창구호와 함께 발대식을 갖는다.

 

우물 안 개구리의 농성이다. ‘휴전결사반대’ ‘포로교환 결사반대’ 의 본문아래의 괘지(罫紙)에다 잇따라 한글이름과 영문이름을 나란히 적고 그 옆엔 손가락을 물어 피를 내어 찍어 내리고, 앞앞이 주어진 별도의 종이에다 선혈(鮮血)의 ‘휴전반대’나 ‘포로교환반대’를 한글로 쓰는 행사를 갖는다.

 

우리는 이제 산 사람이다.  우리는 이제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인간다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 혈서는 정부에 제출될 것이다.  많은 동포가 피를 흘리고 스러졌어도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그들의 피가 헛되이 흘린 피가 되지 않길 바라고서, 우리의 피가 그들의 피를 보상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나 싶어서, 각자는 죽었든 혼이 되살아난 듯 길길이 뛰고 외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목숨이 살아있다. 원혼들의 뜻을 저버리고 ‘북진통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울분의 단초다. 우리는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룩해야한다. 이것은 지금 우리민족이 갖는, 이 시대를 산 사람들의 의무이자 지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온 나라를 지배하는 정치적 철학이다.

 

 

나는 주저 없이 손을 물어뜯었다.  선혈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흥분은 절정에 이른다. 피를 본 인간의 잔학상이 그대로 폭발하여 작은 수용소는 온통 도가니 속 같이 들끓는다.  죽음으로 항거하는 포로들을 향해서 미군들은 간단한 방법으로 진압에 돌입한다. 우리는 지금 마산시민의 ‘휴전반대’ 시위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언덕 넘어는 마산시민이 평화적 시위가 벌어지고 언덕이쪽 수용소에서는 피의 항거가 죽음직전까지 가고 있다.

 

예외 없이 각종 가스탄이 발포되고 우리의 철조망 뚫기는 좌절되고 말았다. 한낮의 소동은 모든 포로가 일시 기절함으로써 폭발음이 그쳤고 골짝 안은 이제 기침소리와 신음소리와  눈물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이미 우리는 포로의 신분을 망각하고 한 민족의 공동의식에서, 동질화된 행동에 돌입한 것이다.  고요하고 한가롭던 신마산 요양소의 주위가 우리포로들의 입주로 인해서 분주한 도시일각으로 변모되었고 요란한 소음에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시끄러운 포로들의 요양소(?)로, 마산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는 것이다.

 

 

봄날의 긴 해가 아직 협곡의 서산에 머뭇거리며 발붙이지 못함은 우리의 통렬한 울부짖음을 연민하여 좁은 골짝에 어둠을 줄 수 없어서고, 싱그럽고 비릿한 해풍이 폭풍으로 돌변하지 않았음은 가슴을 움켜쥐며 사지를 꼬고 스러지는 우리의 숨 막히는 허파를 씻어주어 자욱한 매연의 골짝을 상큼한 냉이의 고향으로 되돌려 냄새 맡게 함이다.

 

 

환원되는 섭리! 시간과 공간 속의 인간, 유한의 인간생명은 현실적 초월의 삶을 살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환원되는 자연 속에서 방금 허파를 부풀리고 있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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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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