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벌판을 얼마나 달렸는지 , 기차는 하얀 팻말의 ‘ 영천 ’ 표지가 보이는 역 구를 벗어나서 멎었다 .
배보다 기차화물칸이 오히려 편안한 것은 비록 경비병의 심한 구박이 있어도 흘러가는 불빛을 볼 수 있고 빙빙 돌아 흐르는 들판을 흘겨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리라 .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 보다 얼마나 대접 (?) 받는 이동인지 ! 하지만 늘 밤으로만 이동하는 포로들은 절로 올빼미가 될 수밖에 없다 .
새까만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두 눈만 반짝인다 . 상대의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니 나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해서 , 차마 내 얼굴이 저렇게 검지는 않을 것이라며 , 자위한다 . 설혹 더 검다 하드라도 보여줄 상대가 없으니 어떠랴 싶고 , 그저 모질게 붙어있는 목숨이기에 몸은 검을지라도 마음만은 물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화차에서 내 몰린 우리는 또 다섯이 어깨를 맞대어 줄지어 세이고 이윽고 셈하여 트럭에 실려서 달린다 .
헌데 마음조차 어두워지니 영락없는 올빼미다 . 영천에 도착한 때에 벌써 날이 새어 사방이 꿰뚫어 보이는데 , 우리를 실은 트럭은 어느 들판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다 . 당국은 포로들에게 이동 경로를 보이지 않으려고 야간이동을 하는 것이겠지만 어느 경우든 사람의 일이라 차질이 있는가보다 . 시야가 트인다 .
수학기를 거친 앙상한 사과나무 가지에는 주인이 미처 가려 찾지 못한 사과 알이 드문드문 매달려있다 . 저를 가렸던 잎새가 떨어져서 드러났고 , 대지의 부름소리 듣지 못해서 떨어지지 못했다 . 안쓰럽게 매달려 있는 사과알을 보니 불현듯 떠오른다 .
내가 있는 이 땅의 또래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신음하는 나 같은 사과도 있는가 하면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제 소임을 다하고 한 역사의 토막은 잇는 영광된 삶을 살다 사라진 이도 있는 것처럼 , 같은 나무에 달렸어도 이미 세상에 많은 이의 사랑 속에 생을 다한 사과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니 내 삶의 뜻이 거품같이 흩어진다 .
하면서도 딴엔 새로운 의미를 찾아본다 . 남아있는 사과 , 숨겨졌던 사과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 남도 모르게 남게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억지로 끌어내어 나를 위로하며 스스로 달랜다 . 그렇지 않으면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 그냥 숨 쉬는 대로 수족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면 되련만 이렇듯 번민함은 무슨 연유인가 ?
의문은 꼬리를 문다 . 나는 머리를 들어 언덕 밑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사과밭에서 내 작은 존재를 다시 확인한다 . 하나 박에 없던 우리동네 과수원을 생각하면서 세상은 넓고 무진장의 보고 ( 寶庫 ) 라는 것을 느낀다 .
여기에 살아 숨 쉬는 나의 존재가 이렇게 고통 받는 연유를 나의 선택 탓이라고 치부하기엔 내 존재가 너무나 미미하다 .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저 광활한 대지 위의 나무마다에 매달렸던 사과들은 이 시대에 태어나서 한참 자라는 또래의 소년들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
어떻게 살든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삶의 결과는 사는 것 자체로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겠는가 ? 앙상한 나무 가지에 매달린 까치가 쪼아놓은 사과랑 잎사귀에 감추었다가 드러난 사과도 있는 그대로 떨어져서 씨를 땅에 묻으면 그 소임은 다하는 것인가 ? 나도 까치가 쪼아놓은 사과 가아닌가 ! 싶어서 서글프다가도 그냥 살아서 씨라도 뿌려진다면 사는 의미는 있는 것이라고 억지로 사는 이유를 찾는다 .
흙먼지가 넓고 긴 꼬리를 남기며 사과나무 밭을 온통 못 알아보게 덮고 , 트럭은 달린다 . 트럭은 철조망 대문이 기다리는 넓은 마당에 차례로 멈췄다 . 나는 공간적 이동을 했을망정 여전히 굴욕의 굴레를 쓰고 정지된 삶을 저 철망 안에서 살아야한다 .
해는 성큼 올라와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 철망 아래 서리 맞은 풀 섶에는 햇빛이 들어 물기가 흐른다 . 나도 눈가에 물기가 흐른다 . /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