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5 영천

외통궤적 2008. 7. 2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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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5.011111 수용소5 영천벌판

 황량한 벌판을 얼마나 달렸는지, 기차는 하얀 팻말의 영천표지가 보이는 역 구를 벗어나서 멎었다.

 배보다 기차화물칸이 오히려 편안한 것은 비록 경비병의 심한 구박이 있어도 흘러가는 불빛을 볼 수 있고 빙빙 돌아 흐르는 들판을 흘겨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리라.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 보다 얼마나 대접(?)받는 이동인지! 하지만 늘 밤으로만 이동하는 포로들은 절로 올빼미가 될 수밖에 없다.

새까만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두 눈만 반짝인다. 상대의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니 나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해서, 차마 내 얼굴이 저렇게 검지는 않을 것이라며, 자위한다. 설혹 더 검다 하드라도 보여줄 상대가 없으니 어떠랴 싶고, 그저 모질게 붙어있는 목숨이기에 몸은 검을지라도 마음만은 물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화차에서 내 몰린 우리는 또 다섯이 어깨를 맞대어 줄지어 세이고 이윽고 셈하여 트럭에 실려서 달린다.

 헌데 마음조차 어두워지니 영락없는 올빼미다. 영천에 도착한 때에 벌써 날이 새어 사방이 꿰뚫어 보이는데, 우리를 실은 트럭은 어느 들판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다. 당국은 포로들에게 이동 경로를 보이지 않으려고 야간이동을 하는 것이겠지만 어느 경우든 사람의 일이라 차질이 있는가보다. 시야가 트인다.

 수학기를 거친 앙상한 사과나무 가지에는 주인이 미처 가려 찾지 못한 사과 알이 드문드문 매달려있다. 저를 가렸던 잎새가 떨어져서 드러났고, 대지의 부름소리 듣지 못해서 떨어지지 못했다. 안쓰럽게 매달려 있는 사과알을 보니 불현듯 떠오른다.

 내가 있는 이 땅의 또래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신음하는 나 같은 사과도 있는가 하면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제 소임을 다하고 한 역사의 토막은 잇는 영광된 삶을 살다 사라진 이도 있는 것처럼, 같은 나무에 달렸어도 이미 세상에 많은 이의 사랑 속에 생을 다한 사과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니 내 삶의 뜻이 거품같이 흩어진다.

 하면서도 딴엔 새로운 의미를 찾아본다. 남아있는 사과, 숨겨졌던 사과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남도 모르게 남게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억지로 끌어내어 나를 위로하며 스스로 달랜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숨 쉬는 대로 수족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면 되련만 이렇듯 번민함은 무슨 연유인가?

 의문은 꼬리를 문다. 나는 머리를 들어 언덕 밑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사과밭에서 내 작은 존재를 다시 확인한다. 하나 박에 없던 우리동네 과수원을 생각하면서 세상은 넓고 무진장의 보고(寶庫)라는 것을 느낀다.

 여기에 살아 숨 쉬는 나의 존재가 이렇게 고통 받는 연유를 나의 선택 탓이라고 치부하기엔 내 존재가 너무나 미미하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저 광활한 대지 위의 나무마다에 매달렸던 사과들은 이 시대에 태어나서 한참 자라는 또래의 소년들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어떻게 살든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삶의 결과는 사는 것 자체로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겠는가앙상한 나무 가지에 매달린 까치가 쪼아놓은 사과랑 잎사귀에 감추었다가 드러난 사과도 있는 그대로 떨어져서 씨를 땅에 묻으면 그 소임은 다하는 것인가? 나도 까치가 쪼아놓은 사과 가아닌가! 싶어서 서글프다가도 그냥 살아서 씨라도 뿌려진다면 사는 의미는 있는 것이라고 억지로 사는 이유를 찾는다.

흙먼지가 넓고 긴 꼬리를 남기며 사과나무 밭을 온통 못 알아보게 덮고, 트럭은 달린다. 트럭은 철조망  대문이 기다리는 넓은 마당에 차례로 멈췄다. 나는 공간적 이동을 했을망정 여전히 굴욕의 굴레를 쓰고 정지된 삶을 저 철망 안에서 살아야한다.

  해는 성큼 올라와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철망 아래 서리 맞은 풀 섶에는 햇빛이 들어 물기가 흐른다. 나도 눈가에 물기가 흐른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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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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