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기

외통궤적 2008. 7. 2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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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3.011105 만국기

국기란 나라를 상징하는 표상이지만 수용소 안의 각양(各樣)의 국기는 꿈속에서의 제 구실밖에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분산 수용 된 오백 명 단위의 수용소거나 아직 당국의 실권이 미치지 못한 만 명 단위 수용소거나 가릴 것 없이 하늘이 좁을세라 색색으로 펼친다. 각 수용소의 실세에 걸 맞는 국기를 달고 그 깃봉을 중심으로 그들이 선호하는 권역의 국기들을 늘어 달아 하늘을 온통 물들이고 있다.

 

 

만국기는 밤낮없이 둘러쳐진 철조망과 어울리지 않게 넓은 지붕을 이루고 있다. 포로들의 가슴은 펄럭이는 깃발에 설레고 용약(勇躍)한다. 거함(巨艦) ‘거제호’의 앞날이 위태롭다. 꿈과 같은 현실이다.

 

 

전선에서, 피아(彼我)의 공방으로 흘린 피의 바다 위에 떠있는 거제호의 항해는 반란폭도에게 선장이 도리어 억류당하고 선주는 반란폭도를 제압할 수가 없어서, 승무원을 원격 구출하려한다. 이제 갈 길을 잃고 헤매는 ‘거제호’에서 승무원과 승객을 건져낸 후, 배는 반란자와 함께 버려질지도 모른다.

 

 

500명 수용소의 포로들 모두가 밤중에 어디론가 이미 사라지고, 빈 수용소 하늘 위에서 펄럭이든 만국기와 깃봉은 부러지고 끊기어 땅위에 스러질 판이다.

 

국기의 주인은 온데 간데없다.  더하여 만국기를 만들어 단 무리는 미련 없이 떠나고 마는, 국가의 운명을 보는 듯해서 서글프다. 작은 운동장에 만국기를 달고 가을 운동회를 할 때, 미지의 생활문화를 그리며 우러르든 어릴 적 생각에, 잠깐 나를 잊고 펄럭이는 만국기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몹시 흥분시키는 이 만국기의 추억이 일순(一瞬) 나의 짧은 연륜에 새겨서 ‘나의 국기’를, 차례로 줄에 매달면서 내가 산 시대적 운명을 만국기처럼 매달아본다.

 

 

미농지 위에 보시기를 엎어 동그라미 그려 넣고, 먼저 닳아진 빨강색 몽당 크레용을 아끼느라 마음 조여 칠하고 나무까리에서 싸리나무를 골라 빼어 다듬어서 그려놓은 ‘히노마루’를 밥풀로 붙여 들고 정거장에 나가 징병 가는 형들을 환송하여 팔이 아프도록 휘젓든 날, 이날의 난 ‘황국(皇國)신민(臣民)’이었다. 그리고 이때에 까만 바람개비 그려진 ‘도이츠(獨逸)’ 기, 만국기도 익혔다.

 

 

‘해방’은 얼떨결에, 빨간 동그라미 위의 한가운데를 기준으로 엇갈리게 절반의 동그라미에 검은 칠을 더하고 네 귀퉁이에 일 이 삼 사 괘를 그려 넣은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서 솔가지로 엮어 만든 ‘독립솔문’을 지나며 ‘해방만세’를 외치니, 이날의 나는 ‘대한’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이때에 땅 따먹어 별을 늘리는 ‘미(米)합중국’ 기, 만국기도 익혔다.

 

삼팔선이 그어지고 ‘레닌모(帽)’가 넘치더니 그제는 1대 1 비(比)의 네 모 태극기는 아랑곳없이 되었다. 1대 2 비율의 바탕에 빨강 색을 가운데 한 줄 넣어 그 옆에 가는 흰줄 한 줄씩 양쪽에 넣고 가장자리에 파랑 색 두 줄 넣고 깃봉 쪽에 흰 동그라미 파서 그 안에 붉은 멸하나 그려 넣어 구호(口號)대 속에서 ‘위대한 장군만세’ 부르니, 이날의 나는 ‘조선 인민’의 소년단이었다. 그리고 이때에 붉은 바탕에 낫과 망치를 깃봉 쪽에 넣어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붉은 기’,쏘비에트 연방기도 익혔다.

 

 

전쟁과 포로, 개별 면회심사를 거치는 동안 태극기의 진홍색을 다지고 파랑 색이 검은색을 대신했다. 이마에 띠 두르고 ‘휴전반대’ 외치다가 세 가지 색 가스를 차례로 마시니 이날의 나는 ‘대한민국’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이때에 붉은 바탕에 별 다섯 개를 깃봉 쪽에 오마 넣은 무산자의 나라 중국 ‘오성 기’, 만국기도 익혔다.

 

 

아직 나는 모르고 있다. 훗날 알 게 될 것이다. 아주 먼 훗날, 내가 모른 채 또는 안 채 내 손에 들렸던 기(旗)와 익혔던 만국기를 진정으로 알게 될 것이다. 머리를 흔들며 쳐진 걸음을 재촉한다. 말 그대로 일순의 파장이다.

 

 

미군의 호각소리가 들리며 내 귀가 열리더니 귀에 익은 노래가 바람을 타고 한 소절 또렷이 들려오다가 휙 하늘높이 날아가 버리고, 춤추는 만국기만 땅을 떠올리려는 듯 펄럭인다.

 

 

‘거제호’는 휘청거리고 있다. 이렇게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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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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