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초

외통궤적 2008. 7. 27. 12:54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662.011104 동초(動哨)

이제, 수용소 안에는 그 흔하던 휴전반대 소요도 없어졌다. 포로들이 밥 때만을 기다리는 무료한 일상으로 또 되돌아 온지 벌써 며칠 째다.

 

내가 겪는 상념의 무게가 다른 이가 모래알을 씹는 억압의 곤혹과 진배없겠지만 아무도 고통을 호소하거나 씹히는 모래알을 탓하면서 하소연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고통을 호소할 수 없는,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해야하는, 포로 아닌 포로로 자임한지 벌써 석 달이 되었으니 어중간한 우리의 입장을 반길 사람이 이 철조망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답답한 심경에 나는 또 나름의 공간 넓히기의 재주(?)를 부린다.

 

 

느끼느니 나 혼자고 보느니 동초(動哨)뿐이다. 내가 거닐 수 있는 직선거리는 철망을 따라서 쳐진 열 개의 천막, 가로길이인 백 발짝 안 밖이다.

 

수용시설의 규모는 뛰놀 엄두를 못 내도록 아주 작고, 밀도 높게 수용함으로써 갖가지의 말썽을 빨리 제압하도록 설계하여 좁혔다. 이는 수용소 내에서의 자체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강구된 최적의 산물이다.

 

한창 피끓는 나이에 요동치는 몸부림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철조망을 기어오를 수도 없는 노릇, 땅을 파고 굴을 뚫어 탈출을 시도할 수 없는, 이미 길들어서 때만 마냥 기다리는 어중된 포로이니 더욱 답답하다. 사생을 걸고 항거해야할 때는 벌써 지났다. 오직 전향된 삶의 첫걸음을 언제 떼느냐는 것만 있고 그 날을 기다릴 뿐이다.

 

 

긴 여름을 넘기며 해 무리를 벗어 던진 초가을 햇살이 가볍게 철조망 안에 들지만 우리마음은 안개 속에 뿌옇다.

 

 

나는 또 이 공간을 넓히련다. 기댈 수도, 잡을 수도, 가까이 바라볼 수도 없는 겹 철망의 위세에 눌려 한 발짝 물러선 거리에서, 발자국을 옮겨 본다. 되도록 느리게, 될 수 있는 한 좁게 발을 옮겨나간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있는 수용소의 너비는 넓어질 것이다. 아주 작게 아주 천천히 옮긴다.

 

 

나는  지금 철조망을 멀리 내치며 성기게 하고 있다. 그래서 넓은 공간에서 숨 쉬고 힘껏 팔과 다리를 뻗고 싶다. 눈을 지그시 감고 철망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내 시야의 맞은편 가로지기 철망은 아직도 멀게 보인다.

 

옮긴 발걸음, 그 수가 많으면 많은 만큼 철망 안의 너비도 그만큼 넓어지고, 철망은 내 눈에서 아직 멀리 있을 것이다. 맞은편에 닿으면 뒤돌아서 다시 천천히 옮겨놓는다. 이때 나는, 돌아선 것을 잊으려한다. 그래야만 더 넓어지는 것이니까.

 

 

이제 비로써 나는 넓은 공간에서 유유히 거닐고 있는 것이다. 또 맞은편에 닿으려면 이렇게 한참을 걸어야한다.

 

넓디넓은 수용소를 만드는 내 거동에 철망 밖의 동초가 이상을 느꼈든지, 같은 걸음으로 나를 따르며 응시하는 그 눈총에 내 뒤 꼭지가 간지럽다.

 

‘뭐꼬?’

‘?’

‘거 왜카노?’

‘?’

 

 

동초는 초조하다.  곧 무슨 변고라도 있을 것 같은지 총을 겨누고 소리 죽여 따라오다가 되돌리는 내 느린 발걸음에 그는 멎고, 내 눈과 그의 눈이 겹 철망가시사이를 용케도 뚫고 맞부딪친다.

 

‘아저씨, 아저씨는 철조망이 좁아서 편하지요?’

‘뭐라카노? 좁기는? 바다처럼 넓데이.’ 미치고 환장하겠구먼!

 

 

동초는 한없이 긴 철조망을 나와 같이 걸어야하는, 터질 듯한 긴장으로 시간과 공간을 응축시켰다. 안에 있는 포로들이 떠 밀려서 넘쳐날 것 같은 환상과 내가 그 단초라는 착시다. 동초는 신경질적으로 나를 쫓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철망은 다시 원위치로 당겨 좁혀졌다. 좁은 하늘을 한껏 넓혔던 해가 어느새 맞은편 높은 산을 넘으려고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저녁밥 때가 되려면 저 해 그림자를 뒷산꼭대기로 넘기고도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한다.

 

 

열을 받은 천막 안이 후끈거린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밖으로 나온다. 해가 산등성이 소나무를 빗살같이 세우더니 아무소리 없이, 그대로 넘어간다. 금쪽같은 하루가 의미를 찾지 못하는 나를 외면한다.

 

빗살처럼 뚜렷이 나란하던 등성이 소나무와 역광(逆光)으로 돌출된 산마루는 어둠 속에 자취를 묻었고 노을이 남긴 엷은 빛만이 초저녁 별 길을 열고 있다.

 

 

철조망 안의 내가 걷는 느리고 좁은 발걸음은 철망 안 공간이 넓어지는데, 같은 걸음으로 나를 따르는 동초의 철조망너비는 점점 좁아지고, 마침내 넘치는 포로를 의식하는 이 괴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철조망이 아니라 그 안 밖에 머무는 삶의 반향(反響)이리라. 그대로인 포로의 철조망은 자꾸만 좁아져서 그들은 철망을 넓히려하고, 그대로인 동초의 철조망은 자꾸만 넓어져서 그들은 철조망을 좁히려든다.

 

 

바로 이것이다. 서로 다른 행위 궤도의 충돌기점에서 포로와 동초 간에 부딪친 눈빛은 각자의 상사(想思)점을 역전시켜 되돌렸다. 이 접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수용소를 넓히고 활보 할 것이다. 그래서 동초가 내 고통에 또 하나의 짐을 싣는다.

 

 

어두움은 어둠 자체로 시야가 좁아지지만 철조망과의 거리는 흐리고 멀어져서 무한의 공간으로 나를 인도한다. 어둠은 내 원점이고 비롯된 빛으로 내가 있음을 자각한다. /외통-



'외통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간이동  (0) 2008.07.28
만국기  (0) 2008.07.27
고독  (0) 2008.07.27
믿음1의 싹  (0) 2008.07.27
비교  (0) 2008.07.27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