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 가장자리 물고랑 위에 다리를 걸쳐 뻗고 앉는다. 당김줄에 기대어서 발밑을 보니 개미가 줄지어 끝없이 이어간다. 말이 없으니, 아니 못 알아들으니, 저들의 왕국을 건설하러 간다고 외쳐도 내가 알 수 있으랴! 이어지는 행렬은 지렁이 송장을 끌고, 이 개미행렬의 구령 또한 들을 수가 없다. 개미행렬이 구부러져도 호각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정중히 장사 지내려는지, 전리품을 그들의 잔칫상에 올려놓고 한바탕 자축을 하려는지, 곡소리도 안 들리고 환호도 아직 없다. 흩으림 없이 움직이는 개미, 그들의 왕국은 육중 철조망 안에도 거침없이 건설되고, 지렁이는 죽었어도 개미에 의해서 치르는 장사(葬事)는 장엄하다. 그들의 말은 왜 내 귀에 들리지 않는가!
망막에 투영되는 이들 작은 세계의 질서에서도 무언의 진리가 있을 듯, 하여 나는 꼼짝 하지 않고 내려 본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귀를 막는다.
침묵은 나를 무아의 경지로 축소 시켜 소멸시키다가도 영원의 경지로 확대 팽창하여 우주를 삼키기도 한다. 실재하는 난 소멸할 수 있는 외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날 삼키면서 모든 사물을 삼키고 영원으로 들어서는 또 다른 내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것이 나와 관련지어서 나를 있게 하는지, 얼마나 질긴 끈이 달려서 나를 지금 있게 하는지, 그 끈은 어디에 매여서 내게 보이지 않는지, 연(緣)을 찾아 나서는 내 길을 왜 내가 모르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이것이 고독한 나를 더 짙은 암흑 속에서 표류하게 한다.
고독은 존재하는 나를 잊게 하고 수많은 인연에서 멀어질 때, 고독은 본연의 나로 환원되고 만물과 일체 됨으로써 사라지지 않겠는가!
동질의 포로가 아무리 많이 우글거려도 나를 고독에서 건져내지 못한다. 나를 낳고 기게 하고 걷게 하고 뛰게 하는 힘의 원천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뜻(?)이 내게 미치는 대로만 내가 한다면 나의 본질인 그에게 만족하는 것이어서, 나도 흡족할 것이리라.
난 뇐다. 사물의 표징(表徵)은 무 유기물을 가릴 것 없이 그 안에 있는 본연(本然)의 힘이 있어서 실재하는 것이기에, 또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을 이유로 있을 것이기에, 그대로 보인다고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것은 부질없다.
난 이런 것을 개미에게 배운다. 그들이 어떤 수단으로 교감하며 사는지, 전혀 그런 수단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유지되는 질서라면 더더욱 그렇고, 흔히 말하는 본능이라 할지라도, 무궁한 수단(힘)에 내가 끌리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다. 이 말 없는 움직임이 바로 나를 고독과 침묵으로 끌고 가지 않나 싶다. 개미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들 세계 것이어서 내가 몰라도 되련만, 내가 개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기에 이미 난 개미와 연이 있고, 보아서 역시 나를 침묵 속에 무겁게 가라앉힌다.
수용소의 한낮은 500의 숨소리가 요란하여 시끄럽지만 난 고독하다.
잠자리 떼는 육중의 철조망을 넘나들고 개미 떼는 내가 등 붙이고 자야 할 천막 바닥을 후벼 파면서도 여전히 말이 없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