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

외통궤적 2008. 7. 2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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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개별 면회 심사’를 한 뒤부터는 뜻이 맞는 사람끼리만 모여 사니까 한결 숨쉬기 수월하다. 서로의 불신과 경계심으로 팽팽하던 긴장된 분위기가 사라져서 편하긴 해도 맥 빠져서 덤덤하기 그지없다. 그날이 그날 같은 무료한 억류 생활에 신경 쓸 일조차 없어졌으니, 돼지같이 먹고 자기만 하게 된 꼴이다. 먹고 자는 게 전부인 포로 본색으로 되돌아왔기에 진종일 축 늘어져서 낮잠으로 해를 넘기는 판이다.

이런 우리에게도 눈이 번쩍 뜨이는 현안이 걸렸다. 또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 벌어지는 일의 원인을 살피고 귀추와 결과를 점치고, 따른 교훈을 도출하는 못된(?) 짓이 발동할 수 있어서, 나로선 양팔을 벌려 맞을 일인데도 막상 생각하자니 배움이 없는 내 머리론 상상이 되지 않는다.

‘휴전(休戰)’이란 이상한 말이 그것이다. 단순한 생활용어가 아니라 휴전이란 말에 전략적 의미도 따라붙는 것 같아서 더욱 혼미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주 포로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 말, 우리 포로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인 이 ‘휴전’이 지금 내가 평안히 있게 된 현실적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이 ‘휴전’이라는 것이 수용소에 억류된 처지에서 나의 거취와 직접 관련되어 바라보는 휴전일 뿐이었지, 멀리 물러서서 나의 생사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 한국민, 아니 이 땅에 출생함으로 살 권리가 있는 자연인으로서의 휴전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내일부터 우리는 휴전 반대 농성에 들어간다. 이것은 지금 수용소 밖에서 일고 있는 정치 사회적 최대 현안이기 때문에 무능력자인 우리 포로들까지 꿈틀거리나 보다. 이미 우익을 자처하는 포로들은 포로의 신분을 잊고 ‘국민’으로서의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생각나게 하는 휴전에 대한 의문 중에는 우선 이 말이 어린애 장난 같아서 적이 입 갓이 치켜 오를 판이다.

아주 어릴 때, 진흙 구덩이에서 데굴데굴 굴면서 싸우다가도 서로의 힘이 빠지면 할 수 없이 잡았든 상대를 풀어놓게 되고, 누구라 할 것 없이 그냥 일어서며 ‘내일 보자!’, 눈 흘김만 남기고 각자 밥 먹으러 가면 그만이다. 한데, 이 경우는 둘 다 주먹을 쓸 수 없을 만큼 맞붙어 굴러 싸워 상처는 물론 없고 째지고 벗겨져서 피를 보는 일은 더욱 없으므로 해서 가능했다. 어느 쪽이든 누가 상처를 입었다면, 싸운 그들보다 큰애가 한쪽을 편들거나 또 각각이 편드는 형들이 있다면 싸움은 잘잘못과 관계없이 힘센 일방으로 끝나거나 동네 어른들의 심판을 받아서 후속 처리를 하게 마련인데, 반드시 피해자는 보상이 따른다.

집안에서 수습에 나서고 나아가서 동네 어른들의 심판에 복종하는 이 싸움이 어린애의 하잘것없는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 장난 싸움인데, 달리 인력의 손실과 자원의 낭비와 파괴를 무릅쓴 전쟁은 모든 수단의 억지력(抑止力)을 잃었을 때 일어나는 충돌, 곧 어른들의 전쟁일 텐데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인 것이 마땅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전쟁을 어린애 장난의 범주에 넣으려는 어른 시각의 틈에 낀 어린애같이 생각된다.

우리의 염원인 통일의 기회를 잃게 하는, 거인(巨人)들의 장 뼘 재어 땅따먹기 놀이의 ‘놀이판’ 휴식이요, 우리는 이 장 뼘 손가락사이에 낀 사금파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피를 흘리는 미국의 입장과 다른 점은 우리가 비록 부서지고 죽고 다치고 헤어지고 갈기는 아픔이 있어도 세대의 사명을 다하여 한민족의 통일을 꾀함은 백 번 온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힘만으로 싸울 때 가능한 일이다. 설혹 남의 힘을 일시로 빌렸다 하드래도 우리의 세를 주축으로 해야 가능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 모든 조건을 외면하고 오직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이왕 돕는 길에 우리의 장래가 보이게 도와달라는 청이 바로 ‘휴전 반대’라고 생각하니 나도 피를 받은 ‘배달의 씨’라서 솟는 혈기를 느낀다.

민족과 국토에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입고서도 마땅한 대가를 얻지 못할 휴전은 어린애 장난 같은 놀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반대해야 한다.

귀결이다.

난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대오에 합류했다.

잠시 후 파란색의 눈물 탄이 콩 볶듯 터졌다. 사지와 입이 살아있으니 열광하는 함성은 500명이라는 사람 수가 배로 늘어난 것처럼 큰 폭발음으로 증폭되었다. 미군은 방독면 무장의 위세로 두 겹의 철망을 뚫고 들어왔다. 지척에서 하얀 기침 탄을 코앞에 터뜨렸다. 손바닥만치 좁아진 500명 수용소 안에서는 피할 곳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포로들의 함성은 기침 소리로 서서히 변 하지만 철조망을 붙들고 기어오르는 새까만 포로들을 그냥 놓아둘 미군이 아니다. 그들은 세 번째로 ‘노란 질식 탄’을 수없이 발밑에 쏘아댔다. 포로들은 하나씩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주변은 쓰러진 포로들로 새까맣게 뒤덮였다.

상황은 끝났지만, 골은 깊게 패고, 앙금은 두텁게 가라앉았다.

수습(收拾)차 들어온 미군은 싱글거리며 눈물 콧물이 범벅되어 엉겨 붙은 우리의 몰골에 등을 두들기고 위로한다. 하긴, 그들인들 무슨 잘못이 있으랴! 우리는 비록 새장 안의 죽지 잘린 멥새지만 이다음에 새로 틀 둥지를 감출 숲을 생각하고 넘보지 못할 큰 냇물을 찾아 세세(歲歲)로 이을 평화를 구하지만, 이들은 당장 이 시간 주어진 일만을 생각하는, 사고의 편차를 그들은 짐작이나 하랴!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자족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지를 벌리고 질펀히 깔린 ‘반공포로’들, 우리는 태어난 곳이 ‘38선 이북’이라는 숙명적 지역 편입에 발 디딘 단순 이유로 이렇게 쓰러지며 발광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기 때문임을 미군은 이해할 수 없다.

포연을 헤치고 탄우를 뚫어 살아남은 ‘반공포로’의 앞길은 여전히 험난하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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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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