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여름. 볕이 거제도의 중심부 남쪽 산골짜기를 뜨겁게 내리쬐어서, 거칠게 자리한 96 수용소 철조망 사이에서 포로들의 숨결을 받아 여리게 자란 풀포기의 물기를 앗아 축 늘어뜨린 어느 한낮이다. 반짝이는 종이쪽지가 눈 내리듯 하얗게 하늘을 가려 내린다. 뿌리고 간 비행기는 보이지 않고 요란한 폭음만 귀청을 찌른다. 하얀 전단은 수용소의 육중(六重) 철망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고르게 흩어진다.
어느 수용소가 온순하고 어느 수용소가 포악한지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요사이, ‘우익’을 자처하는 포로들은 ‘휴전반대’를 외치고 ‘좌익’을 내세우는 수용소에서는 ‘미군철수’를 외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우성친다. 당국은 뒤섞인 그 진실을 알 수 없는 터에, 소요(騷擾)는 휴전회담의 진척에 따라 날로 격해지고 있다. 뚫린 곳이라곤 하늘밖에 없으니 하늘길이 당국의 의사전달 수단의 제일 창구인 셈이다.
‘각자의 향배(向背)를 정하는 ‘개별 면회 심사’를 아무 날 아무 때부터 아무 때까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할 터인즉 곰곰이 생각하여 후회 없는 선택을 할 것이며 심사 순간부터 별도로 분리 수용할 참이니 각자는 소지품 일체를 휴대해야 한다’는 요지의 명령이다. 사흘이나 있으니 생각할 시간은 충분, 하지만 기로(岐路)에 선 나의 고뇌는 폭발 지경으로 팽배(彭排)해 있다.
하루 밤낮을 생각했다. 그리고 홀로 굳은 결심을 하며 합당한 이유를 착착 마련하기 시작했다.
난 우리 가문의 종손으로, 독자이신 아버지가 일찍이 홀로 되신 할머니를 모시고 고생하시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아왔고, 나 또한 맏이로서 가문의 기둥 노릇을 마땅히 해야 하는 업을 타고났으니 응당 이북으로 가야 하련만, 반드시 이런 가업을 이을 환경 보장이 없다. 또다시 전선에 투입되거나 포로의 불명예를 만회한다며 탄광의 강제노동에 끌려가야 할, 자명한 이치에 맞닿아서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때가 되어서 진정 부모를 모시게 될 날까지는 내가 클 수 있는 넓은 천지를 택하자! 많은 선각자(?)가 이미 남쪽에 내려와 있지 않은가? 그들은 기회의 땅으로 남쪽을 선택했지 않은가? 그들은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적수공권으로 이 땅을 밟지 않았는가? 그들은 잡히면 죽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선의 ‘38선’을 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난 지금 이곳에 주저앉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휴전 후 중립국 감시하에 자유 선택의 기회를 얻어 남쪽에 되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몸을 보존하려면 여기 남고자 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안전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만으로도 남을 이유는 충분하다. 또 내가 자라서 노닐 물이 더 깊고 더 넓고 맑지 않은가? 해서 내 꿈을 이룬 다음, 그때 가서는 이북에도 갈 수 있는 변화가 있지 않겠는가? 이것뿐이 아니다. 소위 유물사관에 바탕을 둔 체제의 경직, 개인의 역량을 제한하는 ‘푸롤레타리아(無産者)’ 독재가 마치 민주주의인 양 억지 대는 그 논리의 허구, 물질만으로 구성된 사람이라고 정신세계를 도외시하는, 종교적 탐구의 제한된 환경, 설상가상으로 전쟁책임의 전가는 나를 정신 차리게 하는 움직일 수 없는 대목이다. 형이상학이 어떤지 냄새 맡게 하는 자유, 이런 것들은 배우지 못한 나로 하여 이 땅이 자석처럼 당기는 또 다른 힘이 된다.
난 여기 남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시치미 떼고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 ‘정’ 아무개를 찾아서 그의 천막에 갔다. 아무도 모르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내가 먼저 물었다. ‘니(너), 남을래?’ 외마디 물음에 그는 ‘난 남는다!’ 그 또한 외마디 대답이고 이어서 나 또한 ‘나도 남는다! ’ 는 외마디 말로 끊고 굳은 악수로 이제까지의 우정을 재확인했다.
천하를 얻은 것 같이 가슴이 꽉 차올랐다.
이윽고 고향 일가의 아저씨에게 가서 조용히 불러 외진 곳에 가서 물었다. ‘전 남을 텐데 아저씨는 어떻게 할 거요?’ 내 물음에 아저씨는 ‘나도 남는다! ’로 응답하였다. 우리는 남다른 교감을 뜨거운 혈육의 정으로 확인했다. 이로써 난 이 땅에 적어도 진실한 두 사람의 의지(依支)처를 두었으니 장차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틀 남은 ‘면회 심사’ 때까지 난 번갈아 가며 이들의 의사를 확인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를 에울 수 있는 동질의 인자를 만나서 당당히 뛰놀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