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에 일어났다는 살상(殺傷)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다. 이른 아침부터 간밤에 죽은 포로 이야기가 퍼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수용소의 분위기는 더 스산하고 무겁게 가라앉는다.
난 내가 있는 수용소에서도 보지 못한 주검인데 하물며 4중 철조망 건너에서 일어난 희생자를 어떻게 볼 수 있으며 확인할 수 있으랴만, 헛소문이란 늘 뒤늦게 사실로 확인되는 수용소 특유의 정서에서, 적어도 내 귀에 들리는 말만은 사실로 믿고 싶다. 듣는 모든 이가 소스라치지만 한결같지 않고,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난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되뇐다. 곧 무슨 일이 닥칠 것만 같다. 어젯밤에도 ‘좌익’ 수용소에서 그들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포로들이 얼마나 희생되었는지, 당국이 밝히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저 뜬소문에 전율할 뿐이다.
사지가 찢겨서 천막 밑에 묻힌 포로도 있을 것이다. 행으로 탈출의 기회를 얻어 철조망을 기어오르며 ‘살려 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하기는커녕 ‘철망을 넘는 자엔 발포’하는 단순 기준으로 살 수 있는 사람에게 죽음을 주었을 불상사도 있어서, 이승을 하직하지 않았나 생각하면 밤이 두렵고 싫다. 무엇 때문에 생명을 부지(扶持)해야 하는지? 온 천지가 황색의 고깃덩어리 알몸인 채인 수용소 안에서도 살육의 각축은 필요한 것인지? 이 작은 몸,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
수용소 밖 동산에서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떡갈나무 냄새가 상큼하게 유월의 새 아침을 열고, 신록의 숲을 누벼 들어온 햇살이 벌거벗은 포로들의 몸을 비춰 번쩍이고 있다. 자연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이 땅을 지키고 가꾸건만 여기 생물의 못된 한 종은 이 이치를 거스르고 짓밟으려 한다. 하지만 순종하는 자만은 살아남으리라는 신념에 찬 작은 시골뜨기 나는 소용돌이치며 변하는 긴박한 현실 앞에 몸을 되도록 작게 말아 움츠린다.
이제 막 아침 식사를 끝냈다.
별안간 호각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내몰린다. 트럭 행렬이 정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거기엔 옷가지와 담요와 비옷 식기 등이 가득가득 실려 있다. 변고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알몸으로 몰려나온 우리를 적당히 갈라 세워서 한 무리를 지우고, 또 다른 무리를 이만큼 지어서 옷을 입히는데, 옷을 입은 그 자리에서 다섯 사람씩 앉히고 있다. 이럴 때마다 머릿수를 세는 나름의 방식과 차에 태우는 방식대로 빈틈없이 짜 트럭에 태운다. 즉시 남쪽의 산골짝으로 잇달아 올라간다. 모두가 전광석화같이 이루어지니, 이제까지 갖고 있든 모든 소지품은 버려지고 말았다.
철저히 비인간적이며 동물 취급이다. 풍부한 물자이니 지급하면 될 것이고 ‘포로인 주제에 무슨 소지품’이 있느냐는 식이다. 하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떤 수용소처럼 10,000명의 수적 우세로써 어떤 괴상한 사건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니, 당국도 그런 고육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온갖 수치와 오욕이 배었어도 내 작은 손때가 거기 묻어있고 혼이 담긴 소품이 물질의 포화(飽和)에 밀려서 쓰레기로 사라지게 되었구나!
딴은 이런 생각도 의미는 없지만, 생각은 하도록 지어진 나니 작은 머리가 끝내 실마리를 끄집어내고야 만다. 이것은 내가 나무라야 할 여유 있는 항변도, 주제넘은 넋두리도 아니다. 단지 메아리 없이 허공에 날아가는, 보이지 않는 한 티끌의 말 못 하는 몸부림일 따름이다.
오백 명 단위의 수용소에 내동댕이쳐진 우리에겐 이제부터 새 개척자(?)의 관록을 발휘할 계기가 또 마련되었다. 우리가 모르게 급조된 이 작은 단위의 수용소는 밖에서 수용소 안의 숨소리도 들릴 것같이 좁아 쪼그라져 있다. 이제까지는 철조망 밖을 구경하려면 산책 삼아서 걸어 나가야 할 만큼 제법 넓은 단지여서 여유가 있었는데 이젠 제 자리에서 사방의 철조망을 뚫고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도록 작게 쪼그라든 오두막집(?)이다. 여기 작은 수용소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긴 해도 10,000명이 넘는 대규모 시설에서 비교적 속박을 덜 받고 뛰놀던 데 비하면 새장에 갇힌 날짐승의 신세로 전락한 셈이다. 이제부터는 바로 눈앞의 경비병과 언제나 눈을 마주치게 되는, 아주 답답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자초한 결과인 셈이다. 허구한 날 희생자를 내는 골육상잔의 대 수용소에서 당하는 당국의 무력, 포로를 잡은 수용소 소장이 포로에게 되잡혀서 치욕을 당한 그날의 앙갚음으로, 수적 힘에 눌려서 그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우스운 꼴을 더 참아낼 수 없어서, 이렇게 작게 쪼개어 관리한다. 단 500명씩의 포로를 묶어서 이중철조망을 치고 그사이에 또 둥근 철망을 치고, 이런 수용소를 네 개 묶어서 또 이중의 철망을 두르며 그 안에 원(윤)형 철망을 쳤으니, 밖으로 탈출하려면 철조망 여섯 곳을 뚫고야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꼴이다.
하늘만 보이는 수용소다. 여섯 겹의 철망을 뚫고 볼 투시력을 가진 초인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보는 밖의 풍물은 아지랑이 피듯 아른거릴 뿐,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물속에 들어있는 육중(六重) 그물 안 물고기다.
한결 수월한 관리 미군들은 우리를 향해서 웃음을 띠며 ‘또 난리를 피우면 더 작게 만들 수도 있다.’ 며 몸짓을 한다. 그렇게 할 만도 하다. 워낙 혼난 미군들이니까! 포로는 생명의 위협 앞에 전전긍긍하지만 이들 미군의 웃음은 장난처럼도 엿보인다.
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느리고 둔한 굼벵이 짓을 또 할밖에 없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