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든 큰 무리의 포로들도 여남은 천막이 처진 새장 같은 오백 명 단위 수용소 안에선 양같이 순해졌다. 우리 ‘우익’
수용소 포로들은 이나마도 조용히 받아들이지만, ‘좌익’ 진영이 장악하고 있는 ‘78 수용소’에선 일대 소탕 작전이 벌어짐으로써 그런대로 쪼개졌으리란 생각을 하면서, 멀리 떨어진 이 산골짜기 천막 구석에 쪼그리고 앉는다.
길길이 날뛰는 수용소의 함성도 들을 수 없다. 다만 증강된 미군과 한국군 감시병으로 해서 ‘온 낯에 코뿐’이라는 속담을 실감케 할 뿐이다. 이젠 내 호기심을 자아낼 만한 복잡한 일상이 사라지고 틀에 잡힌 ‘전범자’로서의 고통을 이겨 내야 하는,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져야 할 판이다.
식솔이 적으니, 볼거리도 적어질 뿐 아니라 막사를 배회하며 소일하는 일과도 단조로워 그랬는지, 아니, 필경 재주꾼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 낸 상 싶은 장난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약간 기운 평지인 이곳, 네모진 철조망 안에 ㄱ자로 깔아 친 천막 여남은 개를 비운 나머지 빈터의 높은 곳을 파서 낮은 곳을 돋우어 판판하게 한다는 것이다. 일단 일이 계획됐으니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우리는 할당제로 하기로 했다.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길게, 열 개의 금을 긋고 이곳을 열 개의 천막에 수용된 인원이 천막 단위로 책임을 다해서 땅을 고른다는, 우리 나름의 도급제(都給制) 발상이다.
못마땅한 이 일에 대해서 곰곰이 따져 생각한다. 합리적 사고의 서구인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일을 시킬 리가 없다. 즉 가장 안전하게 갖추어야 할 수용소 시설에다가 흙을 파낸 서쪽엔 일 미터가 넘게 턱지게 하고 또 이 흙을 메운 동쪽 아래는 같은 높이의 언덕이 생기게 해서, 낙상 사고를 유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무모하다 하였겠지, 하지만 또 다른 이유를 찾아서 강행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포로들의 건강과 잡념의 제거요, 당국에 대한 저항 차단이다. 미군들은 아마도 이 일로 하여 몇 달간의 긴 날을 신경 쓰지 않고 방독면 쓸 일조차 없이 평안히, 지켜만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루가 멀다고 벌이는 ‘휴전 반대’ 데모에 진력이 난 이들이 이 일을 과제로 내놓음으로써 한숨을 돌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니다. 땅 파는 일은 우리 민족의 전래 전업인 듯, 곡괭이 자루를 목도로 이용하여 쌀 포대와 거적을 텐트 끈으로 엮어서 훌륭한 운송 수단을 만들고 거기다가 도급 할당까지 벌여 놓았으니, 작업은 밤낮으로 이루어지고, 드디어 사흘 만에 평지로 완성해 놓았다.
주어지는 몫을 거절하지 못하는 숨김없는 기질, 감당할지 주저하면서도 없는 병 앓는 얇은 꾀를 굳이 외면하고, 나서서 내 몫을 다 하고자 목도채를 멘다. 상대는 현장에서 만난 나이 든 아저씨다. 그는 나를 보자 실망하듯 여러 번 훑더니만 어쩔 수 없이 ‘가는 데까지 가 보자’ 고하는 눈치다. 그러나 젊음은 모든 걸 초월한다. 나도 모르게 목도질의 보조가 잘 맞는다. 모름지기 탄력의 조화가 아닌가 하여, 스스로 대견하다.
사흘 동안을 그와 함께 목도질하면서, 난 세상사의 이치를 또 하나 배웠다. 비록 양어깨에 피멍이 들고 뻐개지듯 아픈 육신은 고달팠지만 모든 일은 당함으로써 터득되고 체험적 반복과 이로 인한 미미한 신장(伸長)이 융합되어서 도약으로 이룩된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목도, 일을 끝낸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휴전 반대’의 ‘결사 투쟁’이 바쁘게 진행된다.
미군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리고 다시 방독면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내일이 어쩔지, 모레가 있을지, 아니 당장 이 순간을 살아 넘길지 또 망연자실한다.
그러면서도 무리에 섞여서 머리띠를 두른다.
이것이 내가 살 최선의 방책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