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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통궤적 2008. 7. 2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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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큰 무리의 포로들도 고작  여남은개의 천막이 처진 새장 같은 시설, 오백 명 단위 수용소 안에서는 양같이 순해졌다.


우리 수용소에선 이나마 조용히 받아드렸지만 좌익주도진영이 장악하고 있는 78수용소에선 일대 소탕작전이 벌어짐으로써 그런 대로 쪼개졌으리란 생각을 하면서, 멀리 떨어진 이 산골짜기 천막한구석에 쪼그리고 앉는다.

 

길길이 날뛰며 외치는 좌익수용소의 함성도 들을 수 없다.

다만 증강된 미군과 한국군 감시병으로 해서 ‘온 낯에 코뿐’이라는 속담을 실감나게 할 뿐이다.

 

이젠 내 호기심을 자아낼만한 복잡한 일상이 사라지고 틀에 잡힌 전범자로서의 고통을 이겨 내야하는,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야할 판이다.

 

식솔이 적으니 볼거리도 적어질 뿐 아니라 막사를 배회하며 소일하는 일과도 단조로워 그랬는지, 아니 필경 재주꾼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낸성싶은 장난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약간 기운 평지인 이곳, 네모진 철조망 안에 ㄱ 자로 깔아 친 천막 여남은 개의 자리를 놓아둔 나머지 빈터의 높은 곳을 파내서 낮을 곳을 도두어 평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일단 일이 계획 됐으니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우리들은 할당제로 하기로 했다.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길게, 열 개의 금을 긋고 이곳을 열 개의 천막에 수용된 인원이 천막단위로 책임을 다해 고른다는, 우리 나름의 도급제 발상이다. 못마땅한 이 일에 대해서 곰곰이 따져 생각한다.

 

합리적 사고의 서구인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일을 시킬 리가 없다. 즉 가장 안전하게 갖추어야할 수용소 시설에다가 흙을 파낸 서쪽엔 일 미터가 넘게 턱지게 하고 또 이 흙을 메운 동쪽아래는 같은 높이의 언덕이 생기게 해서, 낙상 사고를 유발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무모하다고 여겼겠지만 또 다른 이유를 찾아서 강행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포로들의 건강과 잡념의 제거요, 당국에 대한 포로저항의 차단인 것이다. 미군들은 아마도 이 일로 하여 몇 달간의 긴 날을 신경 쓰지 않고 방독면 쓸 일조차 없이 평안히, 지켜만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우익진영 포로들의 하루가 멀다 하고 벌이는 휴전반대 데모에 진력이 난 이들이 이 일을 과제로 내놓음으로서 한숨을 돌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니다. 땅 파는 일은 우리민족의 전래 전업인 듯, 곡괭이자루를 목도로 이용하여 쌀 포대와 거적을 텐트 끈으로 엮어서 훌륭한 운송수단을 만들고 거기다가 도급 할당까지 벌여 놓았으니 작업은 밤낮으로 이루어지고, 드디어 사흘 만에 평지로 완성시켰다.


나는 주어지는 몫을 거절하지 못하는 숨김없는 기질, 감당할수 있을지 주저하면서도 없는 병 앓는 얇은 꾀를 굳이 외면하고, 나서서 내 몫을 다하고자 목도채를 멘다.
상대는 현장에서 만난 나이든 아저씨다. 그는 나를 보자 실망하듯 여러 번 훑더니만 어쩔 수없이 ‘가는데 까지 가보자’는 눈치다.

 

그러나 젊음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나도 모르게 목도질의 보조가 잘 맞는다. 모름지기 탄력의 조화가 아닌가하여 대견하다. 사흘 동안을 그와 함께 목도질을 하면서, 나는 세상사의 이치를 또 하나 배웠다. 비록 양 어깨에 피멍이 들고 뻐개지듯 아프고 고달팠지만 모든 일은 당함으로써 터득되고 체험적 반복과 이로 인한 미미한 신장(伸長)이 융합되어서 도약으로 이룩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쳤다.

 

목도 일이 끝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휴전반대’의 결사투쟁이 바쁘게 진행된다. 미군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리고 다시 방독면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내일이 어쩔지, 모레가 있을지, 아니 당장 이 순간을 살아 넘길지 또 망연자실 한다. 그러면서도 무리에 섞여서 머리띠를 두른다. 이것이 내가 살 최선의 방책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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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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