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고 있는데도 미군들은 어째서 다른 조치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당국은 커다란 혼선을 맞고 있는 것 같다.
중공군 포로수용소와 ‘78 포로수용소’에는 붉은 옷을 실은 트럭이 진입할 수조차 없을 만치 무법천지가 되어있는데도 오히려 밖의 미군들이 철조망 안 포로들에게 굶어 죽을까 염려하는 듯 기중기(起重機)로 비상식량을 넣어준다. 지급된 녹색 의류를 저들 마음대로 뜯어서 나름의 ‘인민군’이나 ‘중공군’의 위계에 걸맞은 복장으로 만들어 입는 꼴을 앉아서 들여다 만 보고 있다. 별도로 손을 쓰지 못하니 정작 붉은 옷을 입어야 할 그들은 이토록 앞가슴과 등 뒤에 ‘포로(p․w)’의 표식조차 없어도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하니 이런 일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심란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봐야 바로 보인다더니, ‘좌익진영’과 ‘우익진영’의 수용소가 그 안에 올라간 깃발로 해서 알아볼 수 있으련만 당국은 아랑곳하질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 손쉬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언제나 시험적 수용소로 자리 매겨져서, 늘 그곳에 담겨 있는 포로들의 심기를 흔들어놓는다. 미군들에게는 좌우의 개념이 따로 없다. 미군들은 다 같은 ‘전범자’들일 뿐이다. 그래서 희생되는 포로의 성분(?)에는 아랑곳없이 단지 그 희생자 수에만 신경을 쓰며 오히려 그들의 사기를 올려주고 있으니 내 눈에 비친 수용소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별천지이다. 옛날 장터에서 ‘요지경’ 통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눈이 부시고 어지럽기만 하다.
어느 수용소에서는 수용소장인 미군 중장이 포로들과 협상을 벌이려고 들어갔다가 무장한 포로들에게 오히려 포로가 되는 세계 전쟁사에 없는 ‘이중 포로(?)’가 되는 기현상에 접하면서, 세상사의 새로운 단면을 새기며 망막에 투사한다.
전쟁 와중에서 녹색 군복에 길들은 내 눈이 다른 색에 민감히 반응하고 반사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벗어 던진 붉은 옷을 처음 보았을 때도 그렇고 철조망 밖 주민의 흰옷을 보았을 때도 익숙하질 않고 낯설었다. 나도 저런 족속이었지만 결국 녹색에 눈알이 그렇게 물들었나 보다. 더군다나 각각(刻刻)으로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에서 눈동자는 녹색의 움직임을 샅샅이 훑어 들여쌓고 쌓아 덕지덕지 층 저서, 또한 딴 색을 거부하는지도 모른다. 또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는 이곳 수용소는 군사시설이라서 말할 나위 없이 초록으로 덮여있고 계절 또한 유월이니 비길 데 없이 푸르다. 단지 하늘을 뚫을 듯이 높이 선 깃대에 갖가지 깃발이 나부끼는 별난 천지가 이상하리만치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내게 비추어진 수용소의 일상이 예사롭지 않다. 무언가 잘못되어서, 통제 불능의 상태로 되는 것 같아 불안하다. 그나마 조용히 있다가 일그러진 과거와 씻을 수 없는 오욕을 숙명으로 받아 고향에 돌아가서 옛이야기로 묻어 두면 될 것을 이 자리에서 명예를 회복한다며, 몸부림하는 그들의 행위를 또한 난 이해 할 수가 없다. 제아무리 ‘반미’ 구호를 외친다 해도, 제아무리 ‘항쟁’의 몸부림을 친다 해도 우리는 ‘거함(巨艦)거제도’의 선창 밑에서 사중의 철조망에 갇힌 전리품인 것을 잊고 있지나 않은 것인지! 또 그 당사자는, 자결하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한 포로인 것을 어떻게 면하려고 몸부림치는지! 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군다나 어리둥절하다.
이러다간 무슨 변고가 닥칠 것만 같다.
소용돌이는 이제까지 자란 시골뜨기 심성을 흔들어 댄다. 내 안에서 조금씩 자라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쭈그러진 젖무덤을 더듬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조차도 파장에 일렁이어 묻힌다. 소용돌이는 바닷바람 풍기는 푸른 고향 들판의 논두렁길도 앗고 허무는 현실로 다가와서, 납작 하게 엎드려 있는 나를 소스라치게 한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