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의 포로 생활이 이젠 몸에 배서 낯설지 않다. 오히려 내가 살아가야 할 터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즈음이다.
어느새 보리 이삭이 패어 물결치고 산과 들엔 연녹색 무늬가 크게 얼룩지며 겨우내 칠했든 황갈색 산야를 신록으로 갈아입혔다. 더러는 흰옷 입은 토박이 농사꾼의 한가한 발걸음도 눈에 들어오는, 봄날의 아침이다. 해양성 기후의 탓이리라. 남녘 바다에서 훈기를 실은 거제도의 봄바람은 움츠렸든 초목을 살아 춤추게 한다. 우리 포로 삶터의 구석구석에도 봄은 어김 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곳 거제도의 커다란 ‘선창(船倉)’ 안에서는 선상 반란의 조짐이 역력하다.
간간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극좌 포로들이 장악하고 있는 ‘78 수용소’에선 철조망을 넘다가 경비병 총에 맞는 일이 잦다느니, 꿀통이라 부르는 반 토막 드럼통에 가득 찬 분뇨 속을 막대로 휘젓는 ‘지이아이’의 거동이 수상하다느니, 아마도 그 속에 각을 떠서 버리는 시체의 부위가 담겨 늘 바다에 버리는 분뇨와 함께 버려지는 것을 막으려는 방편이라느니, 소름 끼치는 소문이 자자하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럴 것 같은 조짐이 있다.
다행, 내가 있는 ‘73 수용소’에는 아직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탈출 포로가 미군에 의해서 체포된다는 것은 내가 있는 이 수용소 안에도 잠입 된 ‘인민군’의 고급장교나 극렬 좌파가 우익진용과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실패하거나 자기 의사를 개진하고 포섭하는 과정에서 들통나서 피하는 포로들의 망명(?)이 있는 게 분명하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 이즈음이다.
그러나 ‘오불상관’. 내가 나설 힘이란 털끝만치도 없이 무력하고, 동질적 관계 구성원이 전혀 없다. 또 초립(草笠)동같이 얇고 여린 품새로는 어림없는, 근처에도 얼씬할 수 없다.
요새는 포로들의 머릿수를 점검하는 미군들의 천막 출입이 예사롭질 않다. 꼭 둘씩 짝지어 다니고, 전과 같지 않게 엄격하기가 그지없다. 모든 막사 안의 포로들이 긴장한다. 행여 우리 텐트의 포로가 없어져, 팔ˑ다리ˑ머리가 잘리지 (각 脚 뜨기) 않았나 하여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고 얼마나 평온할까? 하여 꿈꾸듯 생각한다.
점호를 마치고 햇빛을 맞으려 밖에 나갔다. 우리 ‘73 수용소’에는 오늘도 태극기가 올라 있다. 우리가 수용된 철조망 울타리의 남쪽에 붙어있는 수용소에도 어제와 같이 태극기가 올라 있다. 그러나 그다음 수용소에는 달렸든 태극기가 없어지고 붉은 바탕 띠에 별이 있고 푸른 갓 줄이 있는 ‘인공(人共)’기가 올라 있다. 높디높게 뽑아 올린 깃대에 나부끼는 깃발은 선명히 주홍빛의 중간 띠를 띠고 있다. 드리워질 새 없이 펄럭이는 저 깃발은 유난히 크다.
사방을 다시 둘러본다. 우리는 태극기, 우리의 북쪽 중공군 포로들은 ‘오성(五星)기’, 우리의 남쪽 한 수용소 건너에는 ‘인공기’, 그 건너에 또 ‘인공기’, 오월의 훈풍에 거제도의 하늘은 벌써 가을철 날리는 연 鳶 발처럼 색색의 깃발이 뒤덮여 있다.
내가 우리 땅에 있는지 아니면 중국에 있는지, 아니면 ‘이북’에 와있는지 모르겠다. 여기는 별천지다. 하늘이 모자라도록 높이 세운, 저렇게 높은 깃대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거제도를 바람에 실려 띄울법한 저 펄럭이는 대형 깃발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불가사의가 바로 이것이다. 난 내가 있는 이 철조망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데도 눈과 귀가 모자란다. 하물며 이중으로 처진 철조망밖에 또 다른 이중의 철조망, 사중의 철조망 건너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짐작이나 하랴! 내가 있는 이 철조망 안은 양같이 순하게 길 들은 포로들만 있는 것인지? 적어도 외견상은 그렇다. 태극기도 비교적 작은 것 같다. 내가 볼 수 있는 내 주위의 사람들과 인접한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이 진정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내가 취할 자구책을 미리 생각해야 함에도 도무지 감감한 나날만 보낸다.
요새 갑자기 이는 이념(理念) 파도의 높이가 거제도 섬을 요동치게 한다.
한낮에, ‘78 수용소’의 ‘인공기’의 가운데별과 넓은 띠의 색깔이 ‘짙붉’은색을 띠더니 저녁때는 아예 ‘검붉’은색으로 변했다. 모두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입을 열지 못한다. 누가 누구이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가 없다.
우리는 오늘 밤에 저런 일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모두가 모두를 불신하는 수렁에서 숨죽이고 시시각각의 소식에 귀를 세운다.
‘78 수용소’는 기중기(起重機)로 식량 및 의료품을 들여보낼 뿐 미군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임을 뒤늦게 알았다. 그들은 항거의 표시로 피의 깃발을 그려 올리지 않았나 생각하니 전쟁의 희생물도 아닌, 아무런 명분을 찾을 수 없는, 끼리끼리의 이념 차이 때문에 희생된, 그 깃발에 칠한 피 주인의 영혼을 무엇으로 달랠까?
전율할 뿐이다. 침울한 난 또 엉뚱한 생각에 잠긴다.
어째서 모든 사람의 눈에 다른 사람의 심성을 알아낼 수 있는, 이를테면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그 사람의 피부색이 희게 되기도 하고 검게 되기도 하고 노랗거나 빨갛게 몸에 나타나게 하질 않고 똑같이 보이도록 했느냐 말이다. 색깔을 밖으로 들여내 상대가 알아보도록 해서 대응하거나 피해서 충돌을 아주 적게 하질 않고, 또 어떤 마음 씀씀이에서 같은 몸 색으로 있도록 하여 보는 사람이 상대의 마음을 읽어서 다른 색으로 보이게끔 하지 않은 이치를 난 모르겠다. 이렇게 마음가짐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섭리를 거스르는 교활한 인간 본성에 기인하여 이룩됐는지도 모른다.
피의 깃발은 언제 내려지고 그들의 작은 포로사회에 언제 인도적 주황색의 적십자기가 깃대에 올려질지,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질(異質) 포로들이 희생돼야 하는지, 가슴이 메어온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 숨 쉬는 것이 기적 같아서, 겸허해진다.
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내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