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리라는 생각은 이미 접었다. 긴 날을 어떻게 때워 넘길까 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비벼대는 포로들의 일상으로 나도 자리 잡아 간다.
나는 우울할 때마다 양지바른 곳에 나가 북녘 먼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어 오늘도 생각 없이 그 햇살 바른 구석에 간다. 언제나 네 방위의 하늘 중 색다르게 보이는 북쪽 하늘을 바라본다. 하루 종일 동 서 남의 삼방은 변화무쌍한데 북쪽 하늘만 내 눈이 빨려 들듯 새파랗다.
마음의 색이 하늘에 칠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수용소에 둘러진 산야가 누렇게 떠서 삼 방 하늘에 비쳐 부옇고 북쪽의 손바닥 쪽빛바다가 노해서 하늘에 닿아 새파랄까? 아니면 산야가 빛을 녹여 하늘에 올려서 삼방은 연하고, ‘보이는 곳’ 저 북쪽바다가 빛을 삼켜 하늘에 토해 북녘 하늘만이 새파랄까?
마음속에 멀어져 가던 고향 산하가 북녘 하늘 끝에 까만 한 오리 실처럼 바다 위에 떠있다. 환상이다. 아니다. 갈망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다. 나는 사람의 사고와 행동의 필연적 보상을 생각한다.
사고영역에서의 보상은 좋든 나쁘든 넓든 좁든 생각하는 만큼의 깊이를 얻을 수 있고 물리적 반응을 일으켜서 얻든지 잃음으로써 보상(報償)을 받는다. 신체적 영역에서의 보상은 신체가 가한 자기를 위한 활동과 남에게 끼친 행동으로 양분될 수 있겠다. 자기를 위한 물리적 역동으론 자기에게 해(害)가되는, 아니면 이(利)가 되는 보상이 있겠다. 역시 남을 위한 물리적 역동에도 자기에게 이가 되는 보상이 있는가하면 해가 되는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이름 하여 급부(給付)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이로운 보상인지 잠시는 해롭지만 장차(將次)에 이로울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포로가 되기 전까지 내가 외부에 가한 물리적 힘, 신체적 움직임에 대하여 어떤 유의 보상을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철조망을 그 대상으로 하여 생각한다면 그나마 퍽 바람직한 것이겠지만 그 것은 너무 거창하다. 눈을 돌려, 축소하여, 일을 하러나가서 얻는 누룽지를 생각한다면 지극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무상으로 일을 했으면 했지 알량한 누룽지로 보상받지 않으련다. 그러니 보상의 원리를 따지자면 결과를 예측하여 행동하는 지혜가 필요할 듯하다. 그러나 이 또한 내 편견일 수 있다. 그것은 작업 나간 사람의 신체적 공여에 대해 다른 사람의 신체적 보상이 따를 수 있는 개연성도 있기 때문이다.
포로가 되기 전의 전력(戰歷)이 보상된다면 아마도 나는 이로운 쪽의 배상(賠償)이 있을 것이다. 나는 도매금으로 넘어가는데 덤으로 얹힌 생선에 진배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멋도 모르고 하라는 심부름을 착하게 했을 때 돌아오는 보상은 칭찬이다. 헌데 도중에 엉뚱한 짓을 함으로써 그 심부름을 제대로 다하지 못했다면 그 아이는 매 맞는 보상이 기다릴 것이다.
나는 이 매 맞는 보상이 싫다. 그러나 심부름을 시킨 어른이 도둑질을 시켰다면, 그 것이 도둑질임을 알았을 때 그에 따른 적절한 몸가짐을 가졌다면, 아마도 그에게는 다른 이가 충분한 칭찬과 함께 적절한 보상도 줄 것이다. 나는 이 심부름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지느라 겨울철의 냉기 진 천막 속의 하루를 거뜬히 갈아 없앴다.
인생은 작용과 반작용 즉 저지르는 일과 보상받는, 연속적 시간 때움에 다름 아니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