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

외통궤적 2008. 7. 2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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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5.011003 장터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고향의 장터는 우리 집에서 쓸 물건이 남의 집에서 만들어져 선보이건만 여기 포로수용소에서는 어떻게 된 영문이지 한 철조망 안에서 똑같은 물품을 지급받아 쓰면서도 전혀 색다른 물건들이 슬그머니 생겨나고 이 또한 저절로 생겨난 장터에서 미군 몰래 거래된다.

 

천으로 만든 마실 물주머니가 줄을 지어 매달려있는 73포로수용소의 동남쪽 넓은 공간엔 저녁때가 되면 어김없이 포로들이 모여든다. 멀리서 보거나 스쳐보면 그들은 모두 하릴없이 그저 산책을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윗도리 오지랖 속에 나름의 물건을 감추고 있거나 멀리에 한 패의 또 다른 한 사람이 망을 보는 빈 곳에 물건을 두고 흥정만 하고 물건은 나중에 보이려는 사람들이다.

 

그런가하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주머니 속의 '담배화폐'만 믿고 무언가를 사려는 사람들도 있다. 망루에서 내려다 볼까봐 제가끔 힐끔힐끔 그쪽을 흘겨보는 것이 수상 적다.

 

욕심이 없으니 살 것도 없고 팔 것도 없는 내가 이곳을 어슬렁거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물정을 알고 싶고 사람들의 동정이 흥미로워 그렇다. 더하여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이채로운 인심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배를 채우려고 똥통 메는 일을 안 했으니 그 귀한 누룽지가  수중에 있을 수 없기에 이곳에 나와 거래 할 일 없고, 또 체구가 작고 먹성도 안 좋으니 주는 밥으로도 충분하여 여기 나와 먹을 것 구할 리 없고, 담배도 충분하니 담베구 허려 또한 여기 나올 리 없다. 그렇다.  이렇듯 내 사정으로는 여기 나올 일이 없다. 그러나 실물 거래조건은 전혀 모르기에 내 알고 싶은 내 본성의 갈증만은 해결할 수 없어서, 그 볼거리를 찾아서 기웃거릴 뿐이다.

 

 

허수아비같이 펄럭이는 팔다리의 옷자락이 성가시어 두 겹 세 겹으로 걷어 올렸어도 나도 모르게 풀려내려서 어느새 곰배팔이 되고 가랑이 아랫도리가 풀려서 마당비가 되곤 한다. 남들과 같이 그 커다란 바지주머니에 누룽지를 사 넣을 일도, 일을 나가서 누룽지를 타 넣을 일도 없다.

 

나는 하루에 한 끼를 주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깡다구가 있어서인지 참을성이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지극히 현실수용적자(現實受容適者)인 셈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낙천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고통을 극소화하는 천부의 기질은 있나보다.

 

그래서 주머니에 누룽지를 잔득 넣고 다니면서 우물거리는 동료포로들을 보면 안쓰럽게도 여겨진다. 비록 영어(囹圄)의 몸이지만 어찌하여 저토록 비굴하게 사는 것일까? 주는 대로 먹으면서 말라서 비틀어지든 피골이 상접하여 ‘미이라’가 되건 그대로 무언의 항거를 해보든지 아니면 철조망에 매달려서 기아(饑餓)를 울부짖다 그대로 총소리와 함께 떨어져서 다른 이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용단을 내리든지 하면 좋으련만, 그러나 모두에겐 잡히는 순간부터 날개를 잘리고 간도 빼이고  기도 꺾기고 혼도 앗겨 껍데기만 있는 인간폐물들에게 살아있는 기백을 찾아보려는 나 또한 벗어나지 못하는 범주의 '번데기'에 불과하니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다.

 

새까맣게 타버린 누룽지를 장터에서 담배와 교환하는 두 포로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서 근엄하기까지 하다. 둘은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켜준 상호 의존의 이 순간을 내일 또다시 마련하려는 약속도 한다. 모름지기 이 둘은 앞으로 계속 '물자루'가 매달린 이곳에 계속 나타날 것이다.

 

 

망루의 어깨에서 촉수(觸手)와 같이 뻗어 내린 촉수(燭數) 높은 감시등이 푸른빛을 띠도록 밝아서 바둑판 눈금 같이 촘촘히 엮은 철조망의 엇갈린 가시 끝을 비추고, 이 빛의 반사광이 서성이며 발걸음 옮기는 내 망막을 찌른다.

 

 

끈적이든 열기가 밤공기에 차츰 식어간다. 등갓 밑 하루살이 떼가 철조망을 조롱하듯 수용소안팎을 넘나들며 일생을 풍미하여 구가한다. 우리가 하루살이 따위를 부러워 할 수야 없지 않는가? 허나, 그것들은 온전한 일생인 것을. 개구멍 찾아들 듯 천막 포장 문을 젖이고 들어가는 내 굽은 등에 걸쳐서 드리워진 앞섶이 맞은편 문을 통해 빠져나가려는 바람을 머금고 올챙이배같이 불룩이 커졌다. 단조로운 생활에서도 변화를 갈구하는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저문다.

 

마음을 조이고 몸을 사리는 거래인 포로들의 상행위는 철조망 귀퉁이의 망루 감시병의 눈총을 피하고 무도회를 여는 하루살이의 비웃음을 모른 체 은밀히, 밤 깊도록 이루어진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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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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