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익히 알고 있는 고향의 장터에서는 우리 집에서 쓸 물건이 남의 집에서 만들어져 선보이건만 여기 포로수용소에서는 어떻게 된 영문이지 한 철조망 안에서 똑같은 물품을 받아 쓰면서도 전혀 색다른 물건들이 슬그머니 생겨나 저절로 생겨난 장터에서 몰래 거래된다.
천으로 만들어진 음료수 물주머니가 어른 덩치만 한 크기로 줄지어 매달려있는 73 포로수용소의 동남쪽 넓은 공간엔 저녁때가 되면 어김없이 포로들이 모여든다. 멀리서 보거나 스쳐보면 그들은 모두 하릴없이 그저 산책을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윗도리 오지랖 속에 나름의 물건을 감추고 있거나, 같은 패의 또 다른 한 사람이 망을 보는 빈 곳에 물건을 두고 흥정만 하고 물건은 나중에 보이려는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주머니 속의 ‘담배 화폐’를 믿고 무언가를 사려는 사람들도 있다. 망루에서 볼 것 같아서 제가끔 힐끔힐끔 그쪽을 흘겨보는 것이 수상쩍다.
욕심이 없으니 살 것도 없고 팔 것도 없는 내가 이곳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단순하다. 물정을 알고 싶고 사람들의 동정이 흥미로워 그렇다. 더하여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이채로운 인심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돋아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니 그토록 귀한 누룽지를 갖고 있을 리 없어서 그렇고, 또 체구가 작아서 먹성도 안 좋으니 주는 밥으로도 충분하고, 담배도 충분하여서 별도의 먹을거리를 구할 일도 없다. 하지만 알고 싶은 갈증을 축여줄 볼거리를 찾지 못해서 기웃거릴 뿐이다.
허수아비같이 펄럭이는 팔다리의 옷자락이 성가시어 두 겹 세 겹으로 걷어 올렸어도 나도 모르게 풀려 어느새 곰배팔이가 되고 가랑이 아랫도리가 풀려서 마당 비가 되곤 한다. 남들과 같이 그 커다란 바지 주머니에 누룽지를 사 넣을 일도, 일을 나가서 누룽지를 타 넣을 일도 없다. 난 하루에 한 끼를 주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깡다구가 있어서인지 참을성이 있어서인지 모름지기 지극히 현실수용적자(現實受容適者)인 셈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낙천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고통을 극소화하는, 천부(天賦)의 기질은 있나 보다. 그래서 주머니에 누룽지를 가득 넣고 다니면서 우물거리는 동료 포로들을 보면 안쓰럽게도 여겨진다. 비록 영어(囹圄)의 몸이지만 어찌하여 저토록 비굴하게 사는 것일까? 주는 대로 먹으면서 말라서 비틀어지든 피골이 상접(相接)하여 ‘미이라’가 되든 그대로 무언의 항거를 해보든지 아니면 철조망에 매달려서 기아(饑餓)를 울부짖다 그대로 총소리와 함께 떨어져서 다른 이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용단을 내리든지 하면 좋으련만, 그러나 모두에겐 잡히는 순간부터 날개를 잘리고 간도 빼고 기도 꺾기고 혼도 앗겨 껍데기만 있는 인간 폐물들에게 살아있는 기백을 찾아보려는 나 또한 벗어나지 못하는 범주의 '번데기'에 불과하니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다.
새까맣게 타버린 누룽지를 장터에서 담배와 교환하는 두 포로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서 근엄하기까지 하다. 둘은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켜준 상호 의존의 이 순간을 내일 또다시 마련하려는 약속도 한다. 모름지기 이 둘은 앞으로 계속 물 자루가 매달린 이곳에 계속 나타날 것이다.
망루의 어깨에서 촉수(觸手)와 같이 뻗어 내린 촉수(燭數) 높은 감시 등불이 푸른빛을 띠도록 밝아서 바둑판 눈금같이 촘촘히 엮은 철조망의 엇갈린 가시 끝을 비추고, 이 빛의 반사광이 서성이며 발걸음 옮기는 내 망막을 찌른다.
끈적이든 열기가 밤공기에 차츰 식어간다. 등갓 밑 하루살이 떼가 철조망을 조롱하듯 수용소 안팎을 넘나들며 제 일생을 풍미하여 구가한다. 우리가 하루살이 따위를 부러워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들은 온전한 일생인 것을.
개구멍 찾아들듯 천막 포장문을 제치고 들어가는 내 굽은 등에 걸쳐서 드리워진 앞섶이 맞은편 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바람을 머금고 올챙이배같이 불룩이 커졌다.
단조로운 생활에서도 변화를 갈구하는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저문다. 마음조이고 몸을 사리는 거래인 포로들의 상행위는 철조망 귀퉁이의 망루 감시병의 눈총을 피하고 무도회를 여는 하루살이의 비웃음을 모른 체 은밀히, 밤 깊도록 이루어진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