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

외통궤적 2008. 7. 2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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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6.011008 피난민

거제도의 지세가 내겐 아직 낯설다. 외부와 맞닿는 철조망 가에 가까이 다가가면 혹시 닫힌 마음이라도 트일까, 뭐 뾰족한 수라도 날까. 하여 철조망 가에 나가본다. 오늘은 산이 올려다보이는 동녘 철조망 가로 다가간다.

뒤돌아, 잡힐 듯 다가선 서쪽 산허리가 밝은 햇살을 받아 퍼져 황갈색으로 변했으나 뫼 뿌리와 작은 들판은 어제가 아쉬운지 흑갈색 그대로 습기를 머금어서 명암이 뚜렷하다. 오늘이 어제를 산 밑으로 밀어 내리며 내게 다가온다. 어제가 아닌 오늘의 햇살을 받으려면 난 더 기다려야 한다.

해는 동쪽에서 뜨건만 빛은 서쪽에서 다가오는 괴이한 현상을 바라보니 아련히 고향의 아침햇살이 눈꺼풀에 닿는다. 뜨는 해가 맞바로 나를 비추는 고향 집에서의 해, 오늘의 해를 반사 없이 맞든 일상에서 일탈해 전전하다가 이제는 그 오늘이 어제에 밀려 거꾸로 가는 듯, 낯선 곳에서 발 묶여 있으니 어찌 몽롱하지 않으랴! 머리를 흔들어 본다. 다시 몸을 돌려 해 뜨지 않는 동녘, 어제의 검은 그늘이 가시지 않은 동쪽 산 밑을 향하여 몸을 비튼다.

산기슭을 따라 깔린 길 위에 시선을 얹어 오른쪽으로 끌어가니 제법 키 큰 감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뒷산의 무성한 잔 소나무와 경계 지어 그사이에 두어 채의 초가가 보인다. 모름지기 잇달아서 돌아간 산모퉁이에는 꽤 많은 집이 남쪽을 향해 닥지닥지 붙어있을 듯하다. 마른 풀포기조차 없는 누런 황톳길이 제법 넓기도 하려니와 다져진 것 같이 보여, 많은 사람이 오가며 길들인 것 같다. 마땅히 이 길을 오가야 할 농사꾼은 보이질 않고 입성과 거동이 이상한 사람들만이 오락가락하며 이쪽을 유심히 본다.

산 밑 언저리에 가로 깔린 길, 길 이쪽에 댓 발짝 떨어져서 곧바르게 가로 처진 이중철조망에도 햇빛이 쏟아서 거미줄 같은 가시철사 망의 가시가 반짝 비치더니 어느새 길바닥 작은 모래알이 도드라지도록 환하게 비친다. 비로써 내게도 오늘이라는 새날이 동쪽에서 다가왔다. 아니 서쪽에서 밀려들었다.

보이지 않는 동네에서 밥 짓는 연기가 염치없이 후미진 모퉁이를 돌아 철조망을 넘어 들어와 내 코끝을 자극한다.

‘솔가지 타는 내다.’ 혼자 되뇐다. 함께, 행주치마를 잡고 부엌문을 나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다가온다. 눈을 비비고 해를 향해서 긴 기지갤 켜본다.

어머니는 사라지셨다. 햇빛은 길을 건너 동녘 산 서쪽 비탈에 쏟으면서 암록(暗綠) 일색이던 잔솔밭을 연록(軟綠)으로 물들여 버렸다.

난 멍청하게 철조망 밖을 바라본다.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차츰 늘더니 철조망에서 가까운 길 위에는 우리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려는 듯, 어깨가 맞닿도록 옆으로 나란히 늘어서서 뚫어지게 우리를 지켜본다. ‘거기 함흥 사람 없음 매?’ 그중 오륙십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작지만 또렷이 들렸다. 그러나 이 소리가 망루까지 도달되기 전에 포로 중 한 사람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크고 우렁찼다. ‘여기 있지 아이오!?’ 이렇게 오가는 사이 망루의 초병은 민간인을 향해서 소리 질렀다.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함흥 어디임메?’ 망루의 군인과 민간인 간에 소리 없는 신경전이 벌어지더니 어느새 철조망 안의 함경도 출신 포로들은 동녘 철조망으로 벌 떼같이 모여든다. 이번에는 함경도 포로들 쪽에서 자기의 출신 지역을 외치고 철조망 밖의 동정을 살피지만 잠잠할 뿐이다. 망루의 동정을 보다가 또 나직이 또렷하게 되묻는다. 몇 번의 오가는 대화 끝에 서로의 정보가 분석되고 민간인은 다시 동네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 사람과 철조망 포로는 누가 듣든 말든 말소리가 높아지더니 두 사람의 음성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포로들이 웅성거렸고 철조망 안은 함성으로 들떴다.

피난민이란다. 필시, 피난민을 실은 배가 이곳 거제도에다가 그 커다란 아가리를 벌려 쏟아 냈을 것이다. 거제도는 난민과 포로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해만 바라보는 난민 섬이 돼버렸다.

포로나 피난민이나 섬에 갇히기는 매, 한가지이다.

소식을 주고받는 광경을 지켜만 보는 포로들이 상대적으로 풀 죽고, 단서를 얻은 함경도 출신은 고구마 줄기 당기듯 옆으로 넓혀서 친지를 찾아보며 나름의 사는 보람을 찾고 있다. 아무리 염탐해 본들 언저리에도 닿지 못하는 먼 거리의 ‘함흥’과 ‘통천’ 사이의 공간을 좁혀서 알음을 캐기란 당치않음을 알아차린 나는 숫제 철조망 가를 떠나기로 했다.

허전하다. 외로움을 달래볼까, 하여 한적한 귀퉁이로 게걸음을 하면서 애꿎은 동녘 산만 눈 흘겨본다. 해가 비스듬히 동쪽 산의 서향 비탈의 소나무 밑까지 화사하게 파고들어 피난 나온 고향 까마귀들의 발밑을 또렷하게 볼 수 있도록 배색한다.

분명한 새날. 어제가 오늘을 동여매어 묶어놓지 않았고 해가 나를 비추기 위해서 동녘 산 위에서 솟았다. 서쪽 비탈의 솔밭 밑을 밝혀서, 방학 때 솔 갈비 긁으러 다녔던 옛날을 회상하기 충분하니, 이로써 우울하든 내 마음은 그나마 작은 위안을 받는다.

전처럼 혼자고 앞으로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처지를 새기고 또 새기고, 발바닥 두 쪽 너비만이라도 땅에 닿을 수만 있다면 우뚝 서리라고 다지고 또 다진다.

해는 이제 서쪽 하늘을 향해서 기울고 있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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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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