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 면회심사과정에서 일시 격리 수용됐던 빈 수용소에서 돌아온 저녁 무렵에, 천막마다 뒤지고 다녔으나 그 둘이 있던 천막 안에서는 동창생친구와 일가 아저씨는 찾을 수가 없다.
혹시 잠깐 밖으로 나갔는가하여 내가 있는 천막으로 돌아와서 기다리다가 다시 찾아가 보아도 역시 둘은 보이지 않는다. 천막마다 헐렁하게 빈자리가 많은 것으로 보아 꽤 많은 사람이 ‘북’을 선택했나보다.
나는 둘이 있었던 각각의 천막을 돌며 그들이 있었던 자리의 옆 사람들에게 물을 수박에 없는데, 역시 ‘보이지 안’는다는 말밖에 없다. 이튿날도 하루 종일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내 눈앞에서 영영 떠나갔다. 그들이 나를 믿었다면 내게 바른 말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 둘은 내가 조리 있게 설득한다면 필경 남을 사람들이었는데! 둘은 단지 무연고지인 이 땅에 대한 두려움, 이 한 가지 단순한 이유였을 뿐이란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하긴, 속고 속이는 판국에서 연명한 그들이기에 나무랄 것도 없지만 어쩌면 나마져 감쪽같이 위장으로 대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내 진심을 외면하고 배신할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행동에 나는 한 인간으로써 심히 슬퍼하고 있다. 내가 ‘간다.’고해도, ‘남는다.’고해도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가 미치지 않는 철저한 신의에 바탕한 물음에 대하여 위장하여 대답하는 둘의 비인간적 처신에 나의 깊이 없는 사귐을 자탄하고 있다.
둘은 우리가 있는 이 수용소에서의 분위기가 그들의 진의(眞意)를 밝힐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 배경은 ‘나’ 라는 첩자를 보내어서 사흘이라는 공백을 이용해서 어떻게 처치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그렇게 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에, 매사를 가위바위보 식으로 역 추리한다면 결국 당하는 쪽은 추리를 무섭게 깊이 하는 자가 될 것이란 걸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둘은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문답함으로서 그들 스스로의 앞날을 밝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싶어서 차라리 나는 배신감을 억누르는 연민의 정이 깔린다. 그들은 고향의 부모형제를 만나기 위해서 ‘북’을 택하였어도 만날 수 없을 것이고, 평생을 꼬리표를 달고 지내는 가엾은 포로의 허물을 벗어 던지지 못할 것이다.
변색의 명수는 상대의 변색에 되 속아 변색의 의미를 잃고 본색으로 돌아오는, 뼈아픈 교훈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것이다.
나를 두고 그들도 같은 말을 할 것인지? 적이 궁금할 따름이다. 당초에 독자적 결단을 내렸으면 끝까지 비밀로 하여, 오히려 두 사람을 내 의지와 상반되게 권했다면 공허할 내 마음이 오히려 기쁨으로 찼을는지는 몰라도 지금보다 더 무거운, 허전함이 아니라 가책으로 무겁게 짓눌릴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취한 두 사람에 대한 권유의 방식은 온전히 진솔함이어서, 두고두고 후회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순간, 그 둘의 행운을 빌 뿐이다. 아쉬움은 멀리 사라지고 있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