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6 신마산

외통궤적 2008. 7. 2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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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6.011111 수용소6 신마산

잡힌 후, 두 번째 겨울을 무사히 지냈다.

허허벌판에 자리한 ‘영천’ 수용소의 철망 속에서 지내는 동안 내한(耐寒)성 육질(?:肉質)로 변하여서 그랬던지, 더는 기댈 곳 없는 극한(極限)상황에서 추위를 느낄 수 있는 신경조차 몸에 걸맞게 마비되었던지, 영천 벌판에 밀려오는 대륙성 한파를 용케 견디어 냈다. 하긴 이미 발가락과 손가락이 투명한 물고기 눈처럼 알른거리며 부풀러 있어도, 동상(凍傷)조차 그것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하며 두 겨울을 보냈으니까!

많은 포로가 갖가지 병치레지만 회초리 같은 내 몸이 이 어려운 경지를 이겨내는 것만도 스스로 대견하다. 오로지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관하며 버티는 탓이리라. 추위가 천막 안을 들칠 때면 한 사람씩 엇갈려서 누운 면적이 자꾸 줄어들 뿐이다. 밀착될 때, 체온은 상승효과가 있나 보다. ‘영천’은 내게 그 이름조차 ‘긴 겨울 추위’를 담은 이름으로 맴돌고 있다.

지루한 영천의 겨울나기가 끝나고 바닷바람이 상큼한 소나무향기를 뿜어 들이는 ‘신 마산’ 수용소로 밤새 이동해 왔다. 바람 막을 병풍산 한 자락 없는 허허한 벌판보다는 한결 아늑하다. 바다와 산이 맞붙어서 깊고 좁은 골을 이루어 작은 만(灣)을 만들고, 이 곬을 이루는 산줄기가 뒤로 깊이 뿌리를 박아서 높이 솟아있다. 두 산줄기 사이에 좁다랗게 깔아 올라간 작은 평지에 500명씩 수용할 수 있는 닭장 모양의 철망 울을 네댓 개 지어놓고 우리를 맞는다. 이번에도 또 이곳으로 끌고 온 연유를 내가 알 수 없듯이 다른 포로들 또한 아무것도 모른다. 모름지기 영천의 작업량이 줄고 이곳, 마산 부두의 하역 일감이 넘쳐서 노역을 목적으로 이곳에 옮겼는지도 모른다. 이젠 코를 꿰인 송아지처럼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린들 무저항으로 따라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제도 그렇게 여기에 당도했으니까.

바다가 파도를 앞세워 올라오다가 힘 부쳐서 육지가 된 이 골짜기를 가로질러서 서쪽으로 얼마나 이어지는지 모를, 새 길이 나 있고 이 길 건너 바닷가 쪽 후미진 곳에 하얀 이 층 건물이 송림에 싸여서 호젓이 가로 누어 있다.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의지하여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갈구하는 폐결핵 환자의 요양소란다.

이 전란 중에도 저런 병을 치료하는 요양소에 환자가 있다는 것이 지옥에서 바라보는 천당 같아서, 내가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길목에 서 있는 듯하다.

파랗게 올라오는 새싹이 묵은 잎을 젖히는 봄의 약동을 본다. 길 건너 흰 집에 머무는 사람이나 길 이쪽의 닭장에 머무는 우리나 다 함께 새 삶을 찾아줄 봄의 기운을 고대한다. 봄은 어디에서 머뭇거리며 왜 오지 않을까, 탄식한다. 자유롭고 풍요로움이 몹시 부러우나 그 속에 있는 환자의 심경은 우리와 진배없이, 선고된 유한의 삶을 사는 것 같아서 한숨은 더 길어진다. 그러면서도, 결핵균과 우리 포로와의 상관관계는 없는 것일까? 늘 의문을 품고 사는 내 작은 머리가 또 가득 찬다.

우리는 자연사하는 과정을 밟아서 처형되는 것은 아닌지? 이제까지의 많은 수용인원을 갈기고 찢어서 이젠 천여 명 정도로 줄여서 사역 시키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합리성도 엿보이는 포로들의 작은 마을이지만 어쩐지 우리의 세를 잃은 것, 조금은 적적히 외로움마저 든다. 양지바르고 아늑하지만 보이지 않는 천연의 감옥, 요새에 우리가 갇혀있다. 깎아지른 듯이 뻗은 두 줄기 산, 앞은 바다 뒤는 넘볼 수 없는 산, 뿌리 악산이 버티고 있다. 이곳은 그대로 천혜의 감옥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지지고 볶는, 미군의 요릿감이 돼야 한다.

뜻을 모은 일단의 포로들이니 스스로 거역하는 일을 함부로 할 수 없어서, 자제(自制)의 힘을 보이려 능력자(?)가 나타나서 젓고 다닌다. 여기도 패거리가 생기고 낯 세우기 일꾼이 생기며 사람 냄새가 나는 집단과 다름없으니 여러 가지 일들이 밤낮으로 일어난다. 그중에도 정치적 입김이 여기 닭장 안에도 스미는지, 어느새 휴전에 대한 갖가지 정보가 난무한다. 미군을 제친 민족의 이름으로, 각종 종교의 선교목적으로, 이곳에 드는 사회인이 우리에게 조금씩 세상의 물정을 전해주곤 하는 모양이다. 정치 사회적 격랑이 여기까지 밀려 들어오는 것은 아닐지? 상관없는 내게도 격랑의 포말(泡沫)은 피할 수 없으니, 단단히 마음 다지는 밖에 없다.

‘몸을 낮추어라.’ ‘모나면 정 맞는다.’ ‘서두지 마라.’는 할머니의 말씀이 귓바퀴를 맴돈다.

화신(花神)이 길 건너 요양소 길목에 늘어선 벚꽃을 활짝 피워서 간간이 꽃잎과 함께 철망 닭장 안까지 향기를 뿜어낸다. 고향 소학교 운동장의 벚꽃 나무에 매단 전등에 비친 꽃 뭉치의 흰 자태가 내 어두운 마음속을 환히 비춘다. 교사의 나무판자 ‘골탄 : 골타르’ 냄새와 어울린 나의 고향 꽃향기를 맡고 싶다. 그러나 내 육신의 상처에 비하면 너무나 사치스럽다. 오히려 난 근질거리는 손가락과 발가락에서부터 나는 봄의 전령을 맞고 있다. 해동과 함께 찾아드는 동상(凍傷)의 병마여 너는 아직 여름이 멀 것으로 알지만 네 근지러움을 쫓아낼 여름은 이미 너와 함께 와있느니라!

동상(凍傷)은 나의 훈장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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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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