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마산’ 수용소 생활, ‘휴전 반대’ 시위가 없는 이즈음은 가을걷이를 끝낸 농부의 마음 같아서 저마다 느긋하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철조망에 갇힌 생활을 하지만 이곳이 그나마 낳은 곳이다. 활동공간은 좁고 답답할지라도 일과는 매끄럽게, 포로를 조금은 생각하여 운영하는 듯 포근한 나날이다. 개선된 위생시설도 전례가 없었다. 인원이 적기도 해서 그렇겠지만, 우리의 불편은 철조망 밖을 넘보는 것 외엔 그리 제한되질 않는다. 비록 한 데 뒷간일망정 엉덩이나마 가릴 수 있게끔 개인별로 막아주고, 변기도 두꺼운 판자를 동그랗게 파내고 다듬어놓아 그 위에 볼기짝을 붙일 수 있도록, 져들 식의 변기를 만들어 놓고 있다. 다만 분뇨의 처리가 우리의 몫인 것은 여전하다.
난 분뇨통 메는 것이 딱 질색이다. 나이가 어린 탓도 있겠지만 워낙 체구가 작아서, 둘이 메야 하는 분뇨통 나르기의 상대가 불안하다며 짝을 짓지 않으니 더욱 어렵다. 나로선 잘된 일이지만 유일한 노동 보상인 누룽지가 차례 오지 않는 것이 손해라면 손핸데, 나는 주는 밥만으로도 충분하니 내가 아쉬운 것은 없다.
어느 경우든지 둘이 짝을 이루어 살게 돼 있는 사람인 고로 생활 속에서 절로 의기상투하는 짝이 이루어진다. 내 고향과 이웃한 ‘회양’ 군의 동년배, 정확히 나보다 한 살 위인 ‘최유갑’이 또 이 무렵의 내 짝인데, 밥만 먹으면 책과 씨름하는 나를 보고 ‘그게 무엇이기에 그렇게 골몰’하며 꼼짝하지 않고 보느냐면서 자기도 보겠단다. 그러나 모든 건 동기가 있어야 마음이 우러나고 이룩되는 것이지 절로 되는 것이 없는 법인 듯, 하루 만에 진이 빠져서 물러앉으며 나더러 ‘좋은 것이 있으면 같이’ 나누잔다. 해서 우리는 풍금 타는 ‘이동순’ 형에게서 얻은 손바닥 안에 드는 천주교의 ‘교리문답’ 책을 외기 시작했다.
묻고 대답하는 문답식인 이 책은 천주교의 교리를 간결하게 담아서, 믿으려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펴낸 책이다. 이 수첩 같은 책을 읽고 익힌 다음, 시험 치르듯이 물음에 답하여 외워 바침으로써 ‘세례’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둘은 또 경쟁적으로 외었다.
‘교부(敎父)들의 신앙’을 간접 체험하며 아득히 먼, 천육백여 년 전으로 거스르기도 하고 당장에 내 생활 안에서 그들의 참모습을 실천하려는 성급한 생각도 해본다. 그들의 고행과 신앙, 순교는 나로 하여 지금의 생활이 호화롭기 그지없다는 것도 눈 뜨게 한다. 삶을 내 안에서 다진다. 삶은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서, 밖으로 눈을 돌려 찾으려면 무한의 괴로움이 이어질 것이란 것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앞으로 내가 본받아 발자취를 따라갈 성인을 찾아서 그 성인의 이름을 나의 본명(교명)으로 할 텐데, 버겁기만 한 교부(敎父)들의 행적이다. 그런데 나게 감동 주는 분, 내가 흉내 낼 수 있는 한 분이 있다.
포로들을 석방하려 많은 성금을 모으며 백방으로 노력했으며 그의 많은 상속재산을 포기하고 ‘주교’의 자리까지 이른 그의 신앙심과 수도 생활, 그리고 자기희생으로 가득 채워서 나같이 무식한 사람에게까지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친다는 고매(高邁)한 식견, 노동의 가치를 높이 사고 깨끗하고 헌신적으로 노동에 참여하는 정신은 나를 매혹하고, 나를 그와 일치시키는 흡인력으로 작용했다.
성인 ‘힐라리오’, ‘아를르’의 주교( HILARY OF ARLES)의 행적에 매료된 나다. 많은 성인 성녀의 순교와 수도자들의 빛나는 일생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주교를 따르기 결심한 것은 감히 신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을 결의는 아직 갖추지 못했고 그들의 순교 정신을 이을 각오도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난 내 처지에 가장 근사하고 내가 따를 수 있는 분을 택했다. 특히 유별나게 포로에 대한 관심이 많든 ‘힐라리오:힐라리우스’ 주교의 행적은 나를 일체 미동(微動)할 수 없는 경지로 몰아넣었다. 내 본명은 ‘힐라리오’다.
‘이동순’ 형을 ‘대부’로 모시고 ‘네델란드’ 사람인 ‘파지’ 신부의 집전(執典)으로, 닭장수용소의 겹 철망을 열고 나가긴 했어도 여전히 우리를 크게 에워싼 네 겹 철망 안의 다른 겹 철망의 천막 속 ‘미사’에서 이루어졌다.
난 새로 태어난 ‘서 힐라리오’로, 앞으로 신명을 바쳐 창조주의 뜻을 찾아 나서리라고 다짐한다. 성경과 묵주는 내 생활 중의 일부가 되었고 이날 이후 뜻있는 나날을 보낸다.
이제, 철망은 내겐 보이질 않는다. 철망은 내게 한낱 거미줄에 불과하다. 언제든지 마음대로 철망 밖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믿음으로 가득 찼으니, 눈만 감으면 탈출한다. 난 자유인이다. 세상은 내 안에 있다. 신이 나를 창조하셨기에 내 안에 신이 계신다.
오월의 ‘신마산’은 평화가 가득하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