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증을 받아 들고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큰 기와집에 들어서기까지 한참 동안 작은 개울을 끼고 걸었다.
동네를 벗어난 끝머리쯤에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서 넓은 마당에 들어서니, 높은 축대 위에 날아갈 듯이 부연을 달아 올린 기와집이 보인다. 현판이 큼직이 달린 어느 집안의 재실 같다.
간밤엔 여기서 새우잠으로 날을 샜다. 일어나 창밖으로 눈을 드니 앞들은 물기를 잃은 보리가 누렇게 익어 넘쳐 있는데, 바싹 마른 보리 이삭은 건드리면 부서질 것같이 까칠하고, 많은 보리 이삭은 벌써 목이 꺾여있다.
난생처음 보는 남쪽 유월의 들판이 낯설다. 이국의 풍광을 보는 것처럼 이채로워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듣던 대로, 과연 남쪽은 두벌 농사를 짓는 현실에 놀라고, 보리를 베고 그 자리를 다시 써레질해서 모를 심는다는데, 몹시 바쁜 철인인데도 정작 이 일을 할 장정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무렵 그나마 우리의 작은 손길이 일손을 보탤 수 있어서 꽁보리밥을 얻어먹는 미안한 마음을 덜 수 있었다. 아직 보리라는 걸 먹어보지 못한 내 입이 보리를 쉬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고향 집에서의 춘궁기엔 하지감자 포기를 뒤져서 큰 건 달걀만 한 것, 작은 건 새알만 한 감자알을 따내어 삶아 먹든 입, 아버지의 논뙈기 늘리시던 지난날조차도 부드러운 감자에 길든 입이 단숨에 고분고분히 말 듣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먹는 것이 아니라 맷돌 가에 밀기울 흘러나오듯 입 밖으로 밀려 나오기만 하는 것이 남이 볼까 민망하다. 입안에서는 겉 바퀴만 돌뿐 목구멍 쪽으론 다가가지 않는다. 게다가 또 함께 있는 장정들의 기호와 내 식성이 맞지 않으니까 더 어렵다.
나는 생선을 먹고 자란 놈이라서 생선비린내라도 나면 그리로 젓가락이 가지만 이분들은 모두가 푸성귀와 고추장만 있으면 그만이니, 밥 나르는 아주머니들은 말없이 그릇 비워지고 없어지는 찬만 해오므로 내 목구멍은 더군다나 불만이다.
여기는 바다가 먼 내륙이고, 전쟁 중이기에 수송이나 물자의 흐름이 원활치 않을뿐더러 해산물이 비싸서 이곳 사람들조차 비린내 나는 것과는 담을 치고 살고 있다니 나로서는 일직이 체념해야 할 판이다.
철조망 안에 갇혀있을 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한가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이 드는 이 얄팍한 심성이 야속하다. 모두 배부른 소리다. 되도록 빨리 익혀 적응함으로써 내 고통을 덜 수밖엔 없다. 세 끼를 꼬박 꼬박해 나르는 동네 분들의 수고를 볼 때, 남진하는 ‘인민군’ 대열에서 대전 어느 곳에선가 며칠씩 파먹던 생각이 나서 그런지 나는 입맛이 더 쓰다. 하기는 누구나 다 그런 전력이 없진 않겠지만 유독 생각하기 좋아하는 나만 골통 하는지, 아무도 내색하지 않는 대목을 혼자 되씹고 있으니, 밥은 더더욱 모래 씹는 맛이다.
어설픈 먹 새로도 이날까지 살아있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나는 아주 막내니까 여기서도 또 부담은 없다. 하지만 늘 몫을 다하지 않으면 낙오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시련이 닥칠 것이란 예감도 들어서 한사코 따라 붙이고 열을 올린다.
우리 중에 나이 많은 사람 한 사람은 원동기(原動機) 기술이 있어서 방앗간으로 잠시 뽑혀서 갔고 또 다른 나이 든 사람들은 보리 수학에 나섰고 나와 다른 한 애는 ‘지서’에서 주는 군복을 입고 ‘지서’ 근무를 하고 있다. 지서장 말은 이 모두가 일시적 방편이란다.
서너 아름이나 됨직한 느티나무가 자동차 길과 개울이 만나는 다리 옆에 있어서 이 나무 옆에 있는 ‘지서(支署)’는 종일 그늘에 가려있다. 느티나무 언저리에 있으면 하늘이 통째로 없어진다. 오래된 이 느티나무 둘레는 큼직큼직한 돌로 돋아놓고 평평하게 펴서 여름 한철 보내기에 십상인 놀이마당이 돼 있지만 종일 있어도 한 사람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죽은 나무거나 벌레 낀 나무거나 냄새나는 나무도 아닌데, 아무튼 사람은 없다. 느티나무는 종일 빈 마당에 아쉬운 그늘을 내리고 버텨 서서 말없이 말하고 있다. ‘전쟁 탓으로 이렇게 내 품이 허전하다’라고.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