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외통인생 2008. 9. 11.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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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떠올려진 흑갈색 흙에서는 방울방울 물기가 흐른다. 물기는 곧 잦아 스미며 진회색의 생땅이 드러난다. 이런 흙덩이가 길의 양 가장에 흩어져 길게 이어진다. 촘촘히 선 인부들의 손길로 해서 길 모양이 겨우 나타나 있지만 아직은 달구지 너비만큼만 겨우 굳은 땅이고 나머지 가장은 어림할 수 없는 수렁이다. 그 달구지 너비의 길 위에도 질펀히 논흙이 깔려서 길이 아니라 온통 밭두렁같이 되어있다. 보리갈이를 하지 않은 논바닥의 잡초가 함께 엎어진 흙덩이 밑에 깔려 고갱이를 하늘로 향해서 하늘거린다.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어 발버둥만 치고 있다. 끝내 죽고 말 잡초의 신세가 어디 너뿐이겠는가? 사람도, 사람과 함께 사는 짐승도 깡그리 제자리를 잃고 어딘가 떠나거나 팔려나가거나 죽고 말 것이다.

일대(一帶)가 지각변동을 일으킬, 바로 그 자리이니 까짓 논바닥 잡초가 무슨 대수냐 싶은 마음이 문득 든다. 나도 여기서 어쩌면 생을 탈취당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전쟁을 치르는 위험을 각오하고 밤낮으로 싸울 그 자리에 한 발짝 한 발짝 드려놓고 있다. 찌르륵 미끄러지면서 오른발 신 등엔 반죽 같은 질은 흙이 한 무더기 덮이고, 골라 딛는다고 마른 흙을 디뎌 발을 옮겨 몸을 실으면 이번에는 발이 미끄러지면서 옆으로 벌어진다. 겉 딱지만 마른 흙이고 속엔 기름을 칠한 듯이 돌덩이 위를 미끄러진다.

진입로는 혈관이다. 자재와 기계가 이곳으로 수송되련만 아직은 험난하기만 하다. 써레질해 놓은 밭두렁만도 못하고 돌과 자갈로 가득한 강변만도 훨씬 못한, 그저 모양만 길이다.

길이라면서 길이 아닌, 푹푹 빠지는 흙탕을 걸어 언덕이 바라보이는 쪽, 낙동강을 향해서 걸어가는 우리를 향해서 잠시 허리를 펴는 인부들, 한 덩이 흙을 삽에 떠들고 바라보는 인부의 입가에 웃음과 비애가 함께 배어있다.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잘 모르고 있다. 다만 이곳에 농촌이 없어지고 도시와 공단과 고속도로가 생겨서 이 고장에서 살게 될지 못살게 될지를 잡초와 함께 모른다는 것밖엔 아는 것이 없다.

난생처음 보는 이곳의 낯선 풍경은 여태까지의 어느 고장 풍광으로도 비길 수 없다. 파헤쳐진 땅, 해묵고 먼지 덮인 집들, 흐트러진 전신주, 사람들의 차림과 얼굴에 다져진 그들의 각오가 내 초행의 눈꺼풀을 치켜들게 하고 있다.

난 어쨌든 각오가 되어서 이나마 받아들이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내 운명도 이곳 사람과 이곳의 땅과 풀과 이곳의 짐승들과 함께 크게 변화되어 가리라는 어설픈 희망도 그리면서 흙에 묻혀 뜨인 잡풀의 운명과 작은 편차가 눈에 보여 그나마 어깨가 펴진다. 그러나 여기에 오기까지 갖가지 상상에 펼쳐지는 유혹의 고민과 모험이 예상되는 두려움도 적지 않았다.

가족과의 이별도 그 보상으로 기대되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감행하는, 이를테면 사서 고생하는 길을 자청하여 걷고 있으니, 모든 환란은 오로지 극복의 대상일 뿐, 핑계나 원망이나 후회의 길은 벌써 차단되어 있다. 오직 이 외길만이 갈 길이다. 막상 발을 들여놓은 지금은 빠지고 밀리고, 엎어지고, 자빠지는 형국, 그대로가 내 앞날의 징후로 다그치지 않나 싶어서 낭떠러지의 끝에선 비장한 각오로 새롭다.

우리가 묵으며 일할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은 발밑에 검은 바위 절벽을 치고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남으로 흐르고 있다. 멀리 피안(彼岸)의 모래사장을 끼고 흐르는 건너편 물은 연한 하늘색을 띠고 멎은 듯 고인 듯 고요하다. 강 건너 하얀 모래 위 언덕에는 버드나무들이 강기슭을 따라 진을 치고, 마치 이쪽의 북새통을, 팔을 벌려 막으려는 듯 늘어서 있다. 강 그 저쪽엔 눈이 모자라는 벌판이 연두색을 엷게 색칠해 엎드린 먼 산까지 이어진다.

그림처럼 펼쳐진 강 건너 풍광이 고향의 하늘로 이어지며 짜릿한 향수조차 자아낸다. 버드나무 강가에는 나룻배가 하나 걸쳐있고 흰옷 입은 두어 사람이 사공과 함께 배에 오르는, 지극히 평화로운 강 건너는 어느새 이쪽과 별다른 세상으로 비치고 있으니 같은 눈으로 본 양안(兩岸)의 조짐이 이렇게 이상할 수 있는지 또 한 번 무서운 변화의 돌풍을 예감하게 한다.



나도 공사판의 떠돌이가 된 지 어느새 한해가 지났으니 ‘풍월’이 어떤지 ‘읊을’ 수는 없어도 ‘보름달’을 보고 ‘짖어대는 강아지’ 형국은 안 될 듯하다. 눈에 보이는 갖가지 장비와 흥미롭게 벌어지는 장면들은 시야의 끝을 가늠할 수 없도록 아득하고, 들리는 굉음(轟音)과 망치 소리는 천둥이 비껴가게 팔방에서 들려온다. 어딜 보아도 어딜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흙먼지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남쪽에 높이 솟은 ‘금오산’의 짙푸른 위용뿐이다. ‘금오산’이 깔아 놓은 자락으로 동북(東北)의 높고 낮은 구릉과 평야와 개천은 들끓는 지각변동의 소용돌이에 말려서 부글거린다. 일에 따라 펼쳐지는 온갖 말이 새롭고, 생각이 새롭다. 밤새 달라지는 지형과 지물(地物), 산이 있는가 싶더니 어느새 평지가 되고 개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길이 되어있고 집이 있었는가 싶은데 깡그리 밀리고 빈 바닥이 드러나 있는, ‘금오산’ 동북의 작은 개벽(開闢)이다.

한다는 회사들이 제가끔 맡은 일을 그 공기(工期) 내에 마치려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개미 떼같이 일하고 있다. 이곳에선 어디를 가서 누구를 보아도 점퍼와 바지를 말아 넣은 작업화와 작업모를 쓰고 있다. 전선(戰線)에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단면이다. 한 지역을 몽땅 털어서 내동댕이치고 새로 주어 모으려는 심사가 엿보이기도 하는, 여기 ‘구미’에는 눈을 닦고 보아도 흰옷을 입은 사람을 볼 수 없고 작업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볼 수 없다.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나의 시각적 혼란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또한 이때의 감정은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이 뿌리 깊이 내리고 있다. 내일은 아예 없는 것처럼, 오직 오늘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오늘 이 세상의 모든 걸 완성하고 말 것 같은 북새통에서 하루 같이 사는 우리들의 생활은 야전(野戰)에서의 급박하고 엄격한 지휘계통의 그것과 다름없다.

공정(工程)에도 사이클이 있어서 비교적 한가한 ‘디데이’ 전야와 고지를 점령하고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가 있는 것, 거대한 취수장의 수중(水中) 층의 콘크리트 비벼 넣기의 ‘고지를 점령’한 그 뒷날 공사 책임자와 함께 구미 읍내로 나갔다. 읍내에서도 남자의 복장은 작업복과 작업모와 작업화와 흰 장갑 낀 사람들의 일색이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다방도 술집도 음식점도 관공서도, 여기서는 작업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마치 통제라도 받는 양, 군영(軍營)과도 같은 ‘구미’ 일대(一帶)다.

그런데 서울에서 면회를 왔다는 어느 형제의 청으로 우리는 그가 찾는 회사의 현장 위치를 알려주게 되는 우연한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게 내 생애에 크나큰 충격적 이변의 사고(思考)로 몰아가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그를 보는 순간 난 어느 외계인을 만나는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서 한참을 머뭇거렸고 그다음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분명히 그 형제는 말쑥한 정장의 나무랄 데 없는 점잖은 신사였다. 이곳에서 전혀 볼 수 없는 흰색 셔츠는 황새의 목덜미 같고 붉은 넥타이는 닭 볏 같았고 아래위 검은 양복은 돼지의 털을 감은 듯했고 발등만 겨우 덮이는 검은 구두는 말발굽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 형제는 사람같이 보이질 않고 괴물같이 보인다. 분명 그는 일 년 전 나의 모습과 진배없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빈틈없는 나의 일 년 전 모습인데, 이제 내게 비친 저 사람의 차림은 옷이 아니라 누더기 같다. 우리가 입은 이 작업복이 옷이고 저 형제가 입은 옷은 짐승의 가죽 같다.

눈을 감고, 이 엄청난 내 감정의 변화에 난 둔기에라도 맞은 사람처럼 어리벙벙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저 형제의 복장에 그토록 가증할 거부의 빛이 투영되는 것일까? 적응과 순화에서 무서운 변이를 일으키는 가공할 인간상을 깨닫는 순간 흘러가는 만담이 생각난다.

만약 이 세상에 돌연 눈이 세 개 달린 사람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를 괴물이라 칭할 것인데, 거꾸로 이 세상 사람이 모두 눈이 세 개씩 달려 있는데 돌연 눈 두 개 달린 사람이 나타난다면 이 세상 사람은 모두 눈 두 개 달린 사람을 보고 괴물이라 이를 것이다. 이를 뿐 아니라 그를 몰아낼 것이다. 고정적 관념의 엄청난 산물이다. 난 지금 눈 두 개 달린 사람이 괴물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아무런 죄책감이나 자괴감이 일지 않는다. 분명하게 내 눈에 비쳐서 감각기능에 반영된 솔직하고 틀림없는, 진실 표현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의 지적 권익을 농단하는 열강이 지상의 모두를 그들 기준으로, 그들 나름으로, 구획하고 이름 짓고 색칠하고 정의하며 이미 있는 것을 없었던 것처럼 말살하고 활자화한 그 공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서 소위 지구의 표준적 문화로 자리한 것은 결코 잘못된 것임에도 정당히 받아들여지는 우리의 사고가 지금 내 앞에서 내 생각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의 나로서는 작업복이 우리의 입성이고 신사복은 영 어색한, 이국의 야자 잎 가리개같이 보이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사람조차 딴 나라 사람처럼 보이거나 외계인처럼 느껴지는 것을 털어 버릴 수 없다.

난 지금 최면에 걸려있나 보다. 결코 국외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솟다가 잠기며 진흙에 둥그러지면서 숨 쉬고 있는 무명 잡초, 그것이다.

전봇대에 매달린 백열등이 발전기 소음의 높낮이에 어긋나게 밝았다 어두웠다, 빤히 우리의 발길을 당긴다. 산허리의 숙소로 향하는 길,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밤하늘의 별이 내 앞에 쏟아진다. 발걸음을 멈추니 북극성이 산등성 높이 올라 떠 있는 데 아직 숨이 붙어있는 개구리가 애절히 울어대고, 눈을 내려 뒤돌아보면 ‘금오산’ 동북의 온 땅이 불빛으로 환히 이 밤을 밝히고 있다.

이 밤, 땅 위의 모든 장비들의 전조등 불빛으로 빛의 쇼를 벌이고 있다. 쇼는 인간을 위한 쇼이다. 잡초의 고갱이가 영영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일 년 전의 이 길, 흙덩이 밑에 깔린 그 잡초의 고갱이는 영영 하늘의 별을 보지 못할 것이다.

잡초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느님의 피조물인가?!/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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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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