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친숙한 사이처럼, 나를 익히 알고 있듯이, 여러 번째 만난 사람처럼 굴면서 의자에 허리를 걸쳤다. 의원의 행방을 물으며 은연중에 자기의 위치를 드러내 놓은 ‘이 주사’의 행동이 내게 의외의 일이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는 위치에서 특별히 대하진 않고 있다. 하지만 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다.
갖가지 수단으로도 자기 보호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지 않던 소라가 제게 걸맞은 조건에서는 껍질 속에서 몸체를 드러내 보호의 자장에서 이탈하듯이, 나도 그의 깍듯이 차리는 예절로 해서 내 닫힌 문이 그의 선의(善意) 폭만치 열리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 주사’는 내가 있는 술도가 주인이 민의원의원에 당선된 뒤로 사무실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그에게서 어떤 반응이라도 얻어 그의 앞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생각하고 접근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실 난 내 문제도 해결 못 하는, 둔자(鈍者)에 머물고 있으니 이 또한 세파를 타고 넘는 ‘이 주사’가 모를 리가 없겠고, 그렇다면 적어도 훼방이라도 놓지 않기를 바라면서 접근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난 내 형편에 걸맞지 않게 많은 사람과, 그것도 나이와 직업과 무관한, 교유(交遊)하는 꼴이니 이것은 ‘수양산그늘이 광둥 팔백 리’에 미치는 꼴로, 그늘 밑에 서서 그늘을 찾아 모여드는 술수의 고수들과 어울리는 모양이 되었으니 적으나 주제 넓은 사람 같으면 사기를 쳐도 한탕 크게 칠만한 형국(形局)이 되고 있는데도, 난 언제나 같이 그들이 보기에 답답하게 고지식했다.
나를 보고 모두 어디 단단한 곳에 심어 주리라는 다른 사람들의 의중(意中)과는 달리 새파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양조장 지배인(?)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더욱 의심이 나고, 그것이 더욱 나를 돋아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빠른 ‘이 주사’가 이를 간파하고 공세의 목적으로 육탄돌격을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그의 야심은 소속 조합장이라도 생각하고 있는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날 보고 그렇게 친절하게 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이 주사’에 비하면 난 너무나 고자세로 일관했다. 이 땅에의 천애(天涯) 고아 주제에 무슨 심보로 도도했는지, 나도 딱히 알 수 없는 이유의 오기로 자학의 경지로 일관하는 나를 돌아보고 적이 자각하는 바가 크다.
세상은 저렇게, 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내 간이라도 빼놓고 무슨 수모라도 달게 받건만 천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됨됨이를 아무리 자책한들, 한 발짝 옮겨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게 빤한데 그렇게 할 것까지야 있겠나 싶어서 ‘나는 나대로’라고 결단한다.
똥통 나르는 작업을 하며 세 끼를 먹겠느냐, 아니면 안 메고 두 끼를 먹겠느냐 할 때, 서슴없이 두 끼를 선택하는 나니 이슬만 먹고 살고 싶은 충정(衷情)이다. 하지만 세상사를 내 선정(性情)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주사’를 통하여 배운 바를 내 앞길에 잘 적용한다면 모름지기 손해 날일은 아니련만 그렇지 못했다. 늘 어머니가 걱정하시든 ‘좁은 오지랖’ 때문에 내가 겪은 고난의 역정이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고난의 앞날이 훤히 내다보여도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거울과 내 마음 빛이 그 모두를 밝게 칠하고 투영함으로써 극복되리라고 생각하면서, 곰곰이 곱씹는다.
내게는 적어도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빠짐없는 반면교사이니 그의 잘잘못은 제쳐두고서라도 나로서는 반갑고 고맙고 즐거운 일이다.
‘이 주사’는 우리 정치사의 큰 획인 사일구 혁명으로 퇴락(頹落)한 집안의 언저리에 그 자취를 나타내지 않았다. 아마도 새로운 빛의 부나비가 되어서 찾아 나섰을 것이다. 뭇사람의 설계가 이 주사와 같아야 적어도 기초가 다져질 것이고 그 맥이 이어질 것이거늘, 줄도 잡지 않고, 터도 닦지 않고, 울타리도 치지 않고, 홀로 서려는 내 심기가 고약하다 하겠는데, 이것이 날 있게 하는 내 독특한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여 자위할 따름이다. 그러면서 필요한 자기희생, 굴욕적(屈辱的) 인종(忍從)을 망각하고 고고히 살아가는 표상이 환상에 머물 것인지, 그런대로 걸맞게 최소한의 거푸집에 알을 채워서 살아갈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맡기는 수밖에 없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