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 들어 사는 집 이웃에 두 미망인과 외동아들이 마당을 가운데 두고 앉힌 기와집 세 채를 관리하며 살고 있다. 총각은 때론 애송이같이 순진하게 굴다가도 갑자기 천방지축, 망아지가 되어 주위 사람들은 놀라게 한다. 두 어머니는 말할 나위 없고 이웃의 사촌이나 동네 어른도 말릴 수 없게 날뛰고 있었다. 따라붙은 별명이 ‘호랑이’인 걸로 보아서 일찍부터 있어 온 습관인 것 같다. 본인도 자연스레 ‘호랑이’가 본명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누구에게나 ‘호랑이’로 통하고 직접 불러도 꺼림 없이 응대하며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다. 이름이 풍기듯 기골이 장대하고 고집스럽게 생긴 풍이 별명과 걸맞다 싶어서 그 연유를 생각해 본다.
아직은 인생의 첫 길목에서 부질없이 남의 이름을 갖고 생각한다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얼른 그렇게 털리지 않는 이유 하나는 내 기준에서 이해되지 않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호랑이’의 성장과 정에서 스스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엉겼던 부분이 순간적으로 어릴 때의 습성에 촉매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곰곰이 생각해 본다.
‘호랑이’ 별명을 얻기까지 얼마나 기를 살려주었기에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 없고 무서운 사람이 없었을까? 얼마나 사랑을 주었으면 제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없는 줄 알고 있을까?
삶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할 푸른 연륜임을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그동안 내가 본 여러 사람과 견주어 보게 되고 또 나의 성장 과정에 비추어 너무나 동떨어진 행동거지(行動擧止)에 차마 흘릴 수 없어서 생각해 본다.
찾아볼 마땅한 곳도 없고 별것도 아닌 것에 시간을 내어 뒤질 경황도 없기에, 굳이 깊이 살펴보지 않았지만 달리 넓혀 생각할 수 없어서 내가 자란 잣대에다 맞추어 재어보는 것이다.
잣대를 갖다 대기 전에 마름할 감을 먼저 펼쳐야 하니 필(疋)을 풀어 늘어뜨리면 이렇다.
큰어머니의 소생이 없는 가운데 ‘호랑이’는 큰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생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떼쟁이로 자랐다. 아버지와 함께 단란했었지만, 그것도 얼마 이어지지 못하고 아버지를 잃고 말았다. 두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두 어머니 틈에서 자라지만 당연히 호주가 된 ‘호랑이’는 사랑을 두 어머니로부터 듬뿍 받으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이 돼버렸다. 덩치가 크면서 포효(咆哮)하기 시작했고 두 어머니는 아들의 그런 행동에 은근히 잃어버린 남편의 환영(幻影)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두 어머니는 슬슬 어린 아들의 눈치를 보며 생활했다.
‘호랑이’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 버릇이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지면서 또래의 어울림에서 겉돌기 시작했다. 대화는 점점 적어지고 놀이에서 따돌렸다. 외면하는 동무들이 자기를 흉보는 것으로 새기는 ‘호랑이’는 힘으로 제압하려 했고 그럴수록 동무들은 멀어만 갔다.
늘 놀이의 훼방꾼으로 비쳤고 하던 놀이도 ‘호랑이’가 오면 걷곤 했으니 ‘호랑이’는 와글거리는 친구 틈에서 늘 외로웠다. 아마도 이렇게 6년을 지냈을 것이다.
학교라는 공동체에서는 먹혔지만, 사회에서는 누구 하나 거들어 보질 않는다. 이제 두 어머니는 힘없는 늙은이가 되어서 생계를 꾸리려 온갖 장사를 하지만 큰집을 둘러쓰고 있는 ‘호랑이’로선 막일이나 장사를 해볼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이 술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낳은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려 돈을 뜯어 당구장에다가 버리는 건달 생활을 하고 있다.
자아를 폐쇄하여 그 성을 높이 쌓아서 다른 사람이 성 쪽만 바라봐도 성을 공격하리라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트집 잡아 시비하고 완력으로 해결하려는 속성을 지닌 이들, 낙오 아닌 자폐증(?) 환자들은 성장하면서 주위의 간섭으로 더욱 성만 높이 쌓아가는 것 같다.
내 어릴 적 동급생 중에 ‘벙어리’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할아버지가 귀여워하며 기를 살렸기에 웬만한 일은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아마도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가 굴복하는 것으로 단정 짓고 자기를 업신여겨서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거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의 앞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입을 크게 벌려서 말하면 비록 그 말이 욕일지라도 반기고, 얼굴을 비끼거나 입을 오므리고 말하면 반드시 공격적 자세를 취한다.
그런 그의 심리가 ‘호랑이’와 같으려니 생각하면 모름지기 상호 몰이해와 신뢰의 싹을 틔우지 못한 그들에 비해서 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호랑이’와 ‘반벙어리’가 이상 성격으로 변한 까닭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둘 다 유복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말할 나위 없이 덜 익어 시퍼런 풋내기 내가 바라보는 복의 개념은, 입고 먹고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가정환경이 전부다. 난 젖 떨어지면서부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찾아서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고 어른들의 감시망을 벗어나, 있는 듯 없는 듯이 행동하는 버릇이 들었던 가보다.
돌이켜 생각하면, 비록 도와드리지는 못했지만 애태우진 않았다. 그런 내가, 어떻게든 부모님의 무거운 마음을 덜어드리려고 밥숟가락만 놓으면 할딱이며 뛰어 알알이 모아 쟁인 자각의 모래알을, 한 마음 잘못 먹어 몽땅 털어서 짊어지고 떠났다.
부모님께 한을 남긴 나, 몰아치기 ‘호랑이’ 노릇보다 못하고 ‘반벙어리’ 자태조차 못 갖추니 풀리지 않는 이 한을 어찌하면 풀릴까!
‘호랑이’는 지금 두 어머니와 함께 나처럼 옛이야기를 하면서 오순도순 살고 있을 뿐 ‘호랑이’란 별명을 인생의 훈장처럼 닦아서 빛낼 것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