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부지의 애들과 나란히 앉아서 시간을 쪼개 먹는다. 예비종이 울렸다. 이윽고 시작종이 울리고, 종이 소리와 각가지 필기구 소리가 들려왔다. 책상 면이 고르질 않아 찢어질 것 같은 답안지에 신경이 쓰이지만, 시비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첫 시간은 국어 시험이다.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무엇을 물었는지 무슨 답을 썼는지를 도무지 기억할 수 없으니 이 닭대가리 같은 머리를 믿고 오십여 년 전의 일을 더듬는 것이 욕심인 것 같다. 다만 세 과목을 치렀고 그중 내가 뒤지는 수학은 조금 힘들었고 당시의 교과목인 기하는 오히려 쉬웠던 것 같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은 내 기억력의 한계인 것으로, 지금도 그런 부분에는 자인할 수밖에 없다.
모름지기, 시험은 치르는 사람이 준비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전부를 알아내어 이를 토대로 평가하고 알맞은 과정을 이어 나가야 하는데, 그런 방법이 아직은 없어서, 수험생이나 뽑는 학교 측이나 고통을 받는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자기 약점과 한계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본능을 파괴하며 인성을 짓뭉개는 것이 이 시험이란 것이다.
생각해 보자. 사람 이외의 동물은 그들의 서열을 정함에서 시험이란 것을 치르지 않고 자기에게 있는 것, 모두 들어내 보임으로서 상대에게 또는 대적 무리에게 판단을 요구한다. 그 교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판가름 되어서 평온해지고 다음 싸움으로 이행되어 나간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진학이나 승진이나 고시를 이루는 것이다. 이 얼마나 합리적이냐 말이다. 설혹 그것이 위장술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그 동물의 적응 기술이고 생존 수단이기 때문에 탓할 일이 아니다.
이런 동물적인 것이 불합리하고 비능률적이라고 쳐서, 시험만이 우리 인간에게 맞는 방법이라면, 마땅히 그로 인한 고통과 소모는 반드시 따라야 함에도 아무런 대책 없이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것을 이해하질 못한다.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결국 삶다운 삶을 저들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 간단히 치르고 그들의 삶을 만끽하는 것, 즉 시험을 치르면서 소비하는 시간, 긴 인생 여정에서 3분의 1, 아니 절반가량을 제하고 나머지 기간만이 진정한 삶이라고 칠 수밖에 없는, 삶의 자기모순으로 이어진다. 그 나머지 절반도 끊이지 않는 시험지옥으로 해서 삶의 질을 삭감하고 저하한다는 것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옥 같은 입시이고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이것이 우리 사회가 간과하고 있어야 옳은 것인가 말이다.
가치의 전환으로, 신분의 상승 수단으로 이용되는 시험은 인류의 죄악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외곬으로 몰리지 않는 사회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절간을 찾아가는데 시험 치고 가질 않고, 교회에 가는데 시험 치고 들어가지 않듯이 다양한 사회를 또 여기에도 시장원리를 도입하면 어떨까, 싶다.
혹자가 말했다. 교육을 잘하는 것이란 ‘정부 기관이 간섭에서 손을 놓는 것’이다. 그러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다양하게 부양되어서 학생은 절 찾아가듯이 자기가 마음에 드는 학교를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우열(優劣) 학교는 나오게 마련인데? 간섭만 없다면 그 우열 학교는 조만간 없어질 것이다. 왜? 더 좋은 학교를 세우고 찾아들기를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매한 사람이 식별 능력과 판단의 기준이 미흡해서 손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당국의 몫이다. 또 설혹 잘못 판단하고 실수했다고 쳐도 그것이 진정한 교육이 아닌가 싶다. 이름하여 반면교사가 아닌가? 그것을 지도하고 감독하는 것만이 당국이 할 일인 것 같아서 괴변을 늘여놓았다.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지난 것들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끝자락에 서면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나 또한 지난날을 회상하며 뇌까려 보았다.
시험은 다 치렀다.
그래도 딛고 걸어야 하는 길인 것을, 딴 길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랴.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실 밖을 나와서 긴 기지개와 함께 남쪽 하늘을 쳐다보고 손을 털어 내렸다.
다시, 논두렁 가의 쪼그린 아버지 모습이 하늘 저쪽에서 점점 커서 내 앞으로 다가와서 가슴 가득히 퍼졌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