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외통인생 2008. 7. 6.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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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010308 교복

무명천에다 검정 물들여 지은 교복은 아무리 모양을 내려 해도 그저 그런 옷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목덜미를 가리는 빛깔을 깨끗하게 자주 갈아 달며 정갈한 복장을 하느라 신경 쓰는, 내 마음속 한구석엔 작은 근심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이 교복을 빨아서 다려 입는 문제였는데, 우리 집엔 신식양복 다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입성은 재래식 다리로만 다리게 되는, 한복이 일상이니까 다른 다리미가 사실상 필요 없었겠지만, 신식다리미를 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기억에, 교복 한 벌로 사계절을 입고 다녔던 생각밖엔 나질 않는다. 아마 누나의 도움이 컸지 않았나 싶다. 누나는 흰 실로 내 목둘레에 맞는 ‘옷깃’을 몇 개씩 떠서, 수시로 갈아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학생이 교복에 관심 있는 이유는 학생의 신분에 걸맞은 입성이라서 그렇겠지만 그보다는 학생들 간에 암묵적으로 용인된 제복을 다른 집단에서는 찾을 수 없도록 함으로써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지키려는데, 있을 것이다. 다른 집단에서는 그들의 옷매무새나 옷에 대한 감각이 둔해서, 무감각에 가깝다. 그래서 그나마 학생들이 입는 제복을 학생 이외의 사람들은 참견하려 들지 않는가 보다. 물론 지도하는 교사나 학교에 몸담은 사람들은 학생들과 같은 입장이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그들 부류가 입는 입성에 대해서만 오히려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 점은 학생들이 입는 교복을 검은색으로 한 단일원칙을 채택하는 이유를 구성원의 구속을 위함도 있겠지만 학생의 신분을 고려해서 여러 가지 변형을 이룰 수 없도록 함으로써 공부 이외에는 어떠한 명목으로도 옷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함이니 마땅하고 옳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그러니 학교 내에서 이 옷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것은 오히려 학생 스스로다.

학생의 자기네 옷에 대한 제약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색이 검은 옷이 더러운들 알아차릴 수 없는 학생들은 그냥 흰 목둘레 옷깃을 검사하고 말 따름이다. 그 실 우리가 제일 위 학년이니 우리 위엔 우리를 감독할 상급생이 없었기에 아무런 제약을 받질 않고 학교를 순풍에 돛단 듯 다닐 수 있었다.

‘임시교사’에서 공부하는 판에 그까짓 풍기는 찾아서 무엇 한다는 것인지, 씨알이 안 먹힐 소리다. 그래도 어렴풋이 이성에 눈을 뜬 보람 있어서 그나마 교복을 빨아야 하는 때를 찾아서 빨기는 했지만, 다리는 것이 마땅치 않은 것을 안 누나의 주선으로 잘 때에 깔고 자는 방법을 터득해서 그런대로 체면을 유지했던 기억이 새롭다.

시골의 학교는 학생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고맙게 여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늘 발판만 있으면 뛰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 찼던 내가 공부를 무서워할 리가 없다. 공부는 하면 되니까 문제가 없는데, 정작 문제는 졸업장이다. 해서 목적을 향해 달리는 사냥꾼에게 총 이외에는 부질없는 것이란 생각으로 생활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외지에서 학교 다니면서 고향에 내려온 선배나 동창들과 마주치면 괜히 위축되고 뒤돌아보게 되어 분발의 불씨를 싸 안기도 했다.

훗날, 한국에 정착하면서 때늦게, 교복을 입고 싶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 험로를 걸어온 자취를 뒤돌아볼 뿐, 모자와 교복은, 영영 못 쓰고 못 입고 말았다. 그런 검은 모자와 검은 교복의 애착은 한동안에 그쳤을 뿐, 군 복무와 호구(糊口) 사회생활에 눌려서 다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무리 안에서 일어나는 제반사에 집착했던 과거가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된 이즈음, 일반인들의 옷차림도 눈여겨본다.

사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매일 옷을 갈아입는 사람이 있을 것 같고, 옷이 많이 있어도 입는 옷만 계속해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계절이 바뀔 때까지 입는 이가 있을 것 같고, 또 아무 옷이나 편하고 자유로운 옷으로 입으며 남을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수도자나 성직자는 그렇다 치고라도 일상적인 생활인도 모름지기 이런 의복 관을 갖는 이가 있을 성싶은데 이들의 세상 보는 눈은 또 다를 것 같다. 즉, ‘얼마나 관심 둘 곳 없으면 입는 옷에 신경을 쓰고 거기에 시간을 빼앗기겠는가.’고 조소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견지에서 보면 옷은 단 하나 생활의 편의 수단이지 생활 그 자체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일 수도 있다. 그들의 또 다른 생각은 적어도 나는 당신들과 같은 부류는 아니니까 싸잡아서 취급하지 마시라는 항변이 옷으로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색다른 새 옷은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고, 그 옷을 계속 추구한다면 옷을 위해서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서 옷을 걸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항변이 있을 수도 있다.

이렇듯, 모든 가치는 척도를 재는 자를 쥐고 있는 사람 것이지 자(尺)가 없는 사람은 가치를 얘기할 수 없다는 듯, 자를 해가 지면 바꾸고 날이 새면 새것으로 하여서 남이 넘보지 못할, 잘 입을 수 없는 것들을 걸치고 재고 다닌다.

다양한 사회, 다극화된 인간의 심성을 달래려는 이런 의복의 단조로움이 옛날 우리들의 학교생활에서 우리 이외의 척도가 될 수 없는, 그런 의복 개념으로 바뀔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이미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양복이다. 그러니까 양복 한 벌과 생활복 한 벌, 그리고 일할 때 입는 작업복 한 벌 또는 일을 못 하는 사람은 운동복 한 벌, 이것이면 족하리라.

그래서 우리 주변이 옷 이외의 복지에 더 치중하여 전환된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얼마나 풍요로울지 생각해 보면서, 어릴 때의 단벌 교복에 밴 내 냄새를 다시 한번 맡아본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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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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