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 여유 만만한 통학생 친구의 자태가 이해되지 않고 그 친구의 세상 보는 눈이 우리와 달랐다며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하루라도 지각하면 몸이 달아오르고, 지각 다음 날부터는 밤잠을 설치더라도 시간에 맞추어 들어가야 하지만, 그 친구는 다르다. 무슨 배포로 그리 자주 지각하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서 당연하다는 듯이 들어와서, 황급히 책보를 푸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제 할 짓 다 하면서 책보를 끄르고 책상을 정리하곤 한다. 이점이 우리와 판이하다.
선생님도 아예 교실 뒷문을 조금 열어 놓도록, 수업 전에 지시하시곤 하는데 아마도 이는 학생이 들락거릴 때 들리는 소음으로 분위기가 산만해지는 것을 미리 막아보자는 작은 배려인 것 같았다. 물론 이 경우는 겨울철을 제외하고 말이다.
짜 맞춘 듯이 들어맞는다. 그 친구는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크고 덩치도 제일 크다 보니 자연스레 맨 뒷자리의 자리 차지가 됐고 그것도 뒷줄에 앉은 애들끼리 자리를 바꾸어 아예 문 옆에다가 자리를 정하고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들어와 앉곤 하는 짓이, 얄밉도록 정교하다.
내가 뒤돌아보는 습관이 있어서 이따금 볼 때면 없다가도 언제 들어와 앉았는지 와 있다. 첫 시간의 수업이 조금은 어수선하기 마련이니까 그가 공부하는 데는 그리 구애되질 않는지 모르지만, 공부도 그렇게 열심인 것 같질 않다. 그런데도 시험만 치르면 만점이다.
모름지기 우리가 받는 수업이 마음에 차질 않는 것이다. 너무나 월등한 재능을 타고났나 보다. 그는 학교에서 도보 통학 거리가 제일 멀다. 해서 학생 모두와 선생님들이 이해와 격려를 하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먼 통학 거리를 홀로 공부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메워 왔는지도 모른다.
지각을 밥 먹듯이 한 그 친구의 인생살이가 어떻게 변해있는지 자못 궁금하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필경 그는 이 세상을 자기에게 끌어드려서 살면 살았지, 그가 이 세상 것에 매달려서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의 성품이 시간을 의식하질 않고 시간은 언제나 내가 필요한 때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시간 때문에 내가 연연해서 내 할 일을 접어둔다든지, 할 일을 소홀하게 하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각’이라?!,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괴변인지를 알면서 뇌까린다면, 늦게 태어나는 사람일수록 이 세상의 지각생인가? 아닐 것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영겁에서 지각은 우리들의 임시방편으로 만든 말, 이상의 의미는 하나도 없다.
지각! 그 사람보다, 뒤에 시작하는 사람보다는 앞서왔으니 오히려 지각이 아니라 조참(早參)인 셈이니 어쩌면 좋으랴. 아니다. 토막 낸 시간을 단위로 하여서 그 토막시간의 시작한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서 지각이라고 굳이 우긴다면 지참(遲參)이라야 맞겠고 설혹 지참이라고 하드래도 수업이라는 극히 한정된, 피차의 약속을 어긴 꼴이 되어서 문제 되겠지만 이것도 그 수업이 목적하는 바에 어떤 형태로든 부합된다면, 더욱이 충실했다면 지참은 또한 아무 의미가 없다.
‘지각’을 생각하면서,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삶이 아무리 늦게 이루어지고, 아무리 빨리 생을 마친다 해도 그 생은 말 그대로 ‘일생(一生)’인 것이니 여기에 지각이나 지참이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다. 지각이든 지참이든 부질없는 말 짓이라고 생각된다.
여전히 꼬박꼬박 시간 지켜 살아가는 내가, 닥치는 때마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평생을 초조히 사는 내가, 만년 지각하면서 이 세상 것을 자기 안에서 녹이려는 그 친구와는 사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누가 더 알차게 보람 있게 사느냐는 ‘지각’이나 ‘지참’ 따위를 가지고는 잴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음을 느끼면서 내 마음이 텅 비어 허전해진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