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

외통넋두리 2008. 11. 1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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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6701.060326 시발

 

아내는 거실 수납장 앞에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말없이 앉았다. 그리고 세운 무릎 위에 턱을 얹고 한 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가 언짢을 때에 하는 몸짓이다.

 

한 동안을 그렇게 않아 있다가 막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그런 저런 약봉지들로 가득 찬 수납장 가운데 서랍에 넣고는 그 아래 칸 서랍에서 약봉지와 약 절구를 꺼내어 마루에 동댕이치듯 했다. 그리고는 꺼낸 약 한 봉을 찢어 절구에 털어 넣어 찧고서 갈기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다. 이 한 동작이 끝나는가 싶더니 옆에 밀어 놓았던 캡슐도 솜씨 있게 분리해서 가루를 약 절구에 쏟아 붓고는 캡슐을 버린다. 그리고 다시 절구 괭이를 잡는다. 모든 것은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약 절구를 들어 이미 준비한 네모자비 종이에 털어 담더니 물을 물고는 머리를 들어 천정을 보고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모든 절차가 교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더듬고 망설이거나 어눌하지 않았다. 십 년을 하루같이 하루에 세 번씩을 이렇게 밥 먹듯이 약을 먹는다.

 

잠시 이런 일연의 동작을 눈여겨보는 내 발은 마룻바닥에 못질을 해 놓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런 약 먹기가 나를 일상적인 생각에서 끄집어내어 숨을 수 없는 유리판 위에 던져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의 이런 행동을 수없이 보아 오면서도 무심했다. 눈에 뜨일 때라야 겨우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 하다가 아내의 행동이 끝나갈 무렵에는 이내 일상의 내 자리로 되돌아가는, 나와 아내의 무감각이 되풀이되곤 하였는데 오늘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아내도 나도.

 

사람은 음식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약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아닐진대 오늘 아내의 약 복용만큼은 여느 날과 다르게 비친다. 밥보다는 약이 우선하는 아내의 생활, 주요한 일과처럼 된 아내의 약 먹기가 살기 위해서 섭취해야 하는 자양분처럼 되어 있다. 이 뒤집힌 자기의 일상을 모를 리 없지만 아내는 고집스레 끼니는 걸러도 약은 못 거르는 중독증에 시달리고 있다. 일상의 고뇌를 약으로 치료하려는 듯, 작심하여 먹고 있다. 아내는 약을 먹지 않고는 하루도 견디어 내지를 못한다. 더욱 무감각하게 이어지는 아내의 행동에 나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참이다.

 

이제까지 이런 행동을 보고서도 나의 만성적 무감각으로 지나쳐버린 여러 해가 비로써 지금 큰 일깨움의 기회인 듯 나를 옥죄여온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그대로 주저앉아서 아내의 등을 쓸고 입을 열었다. 그전 같았으면 무슨 약을 그렇게 밥 먹듯이 먹느냐고 핀잔을 담은 물음에 아내의 퉁명스런 대답은 머리가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는, 늘 같은 대답이 이어졌을 것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내의 두통호소가 있을 때에 어디론가 떠나면 그 때부터 씻은 듯이 없어지는, 일종의 우울증이 아닌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도 오늘은 무엇인가를 새로이 느끼는 날이 된다.

 

옆자리에 나도 않았으나 마음이 함께 되지 않았는지 아내는 머리도 돌리지 않은 채 벽만 보고 앉아 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비질하듯이 쓸고 있다. 이 버릇은 기분 전환의 때에 이루어지는 아내의 행동이다. 그로부터 잠시 후 나를 올려보며 말하였다. 약 먹기도 지긋지긋하다면서 눈을 치뜨고 무엇인가를 호소하려는 듯 잠시 움직이지 않다가 곧 자세를 바로 하며 말하였다.

 

‘그러니 어쩌겠소.’ 체념이다. 이 말 속에 긴 날의 고통이 담겨 있고 산을 뚫는 듯 머리의 아픔이 있음을 들어내고 있다.

 

아내의 이상(理想)실현에 손잡고 함께 할 사람은 잡히지 않았고 도약의 발판은 너무나 탄력 없었으니 좌절의 긴 날을 보내면서 병을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세월을 되돌려, 모든 여건이 충족되는 환경이라면 애초부터 이런 병은 없었을 것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삶을 살았더라면 아마도 이런 병은 얻지 않았을 것이다. 생활환경이 이상(理想)에 못 미친다고 머리가 아플 정도면 생의 방향을 그 쪽으로 잡아갔을 것이지만 그때에는 미처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나 역시 일상적인 삶 안에서 보편적 삶을 꾸리다보니 남과 다르게 살지 못하고 평범했으니 더 기댈 때가 없어서 더욱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현실적 예증, 그것은 여행을 할 때는 머리가 안 아팠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증명이 된다.

 

그래서 이런 사소한 것조차도 뜻을 이루어주지 못한 내 능력을 지금 참회의 한숨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제란 현실이고 나는 이제를 그제의 시간으로 돌이 킬 수 없다. 그래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아내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무진(無盡) 애를 쓰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질곡으로 헤매고 있으니 안타깝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세월의 회한을 앓고 있는 아내의 병은 반려자인 내가 단초의 원인임을 자각하면서 천근의 무게가 다리에 실려 온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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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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