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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통넋두리 2008. 11. 1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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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을 넘어내려 들판을 쓸고 온 북서풍이 마당을 한 바퀴 휘돌아 치더니 '툇돌' 밑에 모여 있던 가랑잎을 날리며 쑥 향기를 뿜어낸다. 북서풍을 맞는 이른 봄날, 나는 북녘의 러시아에 계시다는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파란 눈의 할머니도 계실까?

 

뙤약볕이 호박넝쿨을 축축 늘어지게 내리쬐는 여름날, 제비가 하늘을 가르다가 처마 밑에 들면 새끼들은 짹짹, 몸보다 입이 크다. 이윽고 차고 나는 어미제비, 몸보다 꿈이 큰 나는  솜털구름을 타고 하늘을 난다. 강변 조약돌에 발을 옮겨서 내가 가는 수평선 맞닿은 곳, 하늘가의 화륜선이 나를 싣는다. 머나 먼 동쪽바다 끝엔 산이 높을까? 들이 넓을까?

 

술 꾸러미 지고 아버지를 따라 성묫길의 태백산록에 이르러서 굽어보는 오솔길, 울긋불긋 물들어서 멀리 가늘어지는 가을 길, 저 길 따라 남쪽으로 가면 임금님이 계시는 대궐이 있을지도 모른다. 뒤돌아, 파란 하늘을 인 산마루턱 나무 위에는 솔개가 나는데, 나는 솔개 따라 영 너머를 넘보았다. 어디쯤인가엔 커다란 마을이, 그 한참 넘어는 대처가 있을 성싶었다.

 

하얀 눈길을 뚫고 오실 고모를 마중하러 정거장에 나갔을 때 아직 고모는 안 오시고, 나만 지나간 기차꼬리에 눈을 매어 철길을 이어갔다. 눈감고, 하얗게 눈 덮인 기차 길을 따라 가고 있었다. 기차의 끝 간 곳은 어딜까?

 

 

이렇게 꿈은 계절 따라 바뀌었고 방향 따라 변해갔다. 내 어릴 적 꿈은 지금도 잔잔히 물결을 이룬다. 꿈은 세월 따라 끊임없이 확대되지만 아지랑이처럼 잡히지 않는 먼 곳에서 언제나 나를 부른다. 현실이 각박하여 꿈은 짓밟히고, 잡힐 것 같으면서도 깨지기 마련인 꿈, 내게는 이루어진 꿈이 없다. 꿈이 이루어지면 맛없는 삶이 될까봐 깨져야 하는지! 그래도 나는 언제나 새로운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헤매면서 살고 있다. 꿈이 없다면 내 삶은 의미를 잃을 것이다. 현실적 희망만을 측량하고 산다면 삶은 너무나 삭막하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삶에 활력을 주고 희망을 줄 것이다. 확실한 생의 담보가 있다면 생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미래가 이미 현실에 와있기 때문에 정작 미래는 소멸의 절망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다행스럽다. 나는 아직 깨지지 않는, 깰 수 없는 꿈이 있다. 어릴 적 꿈을 아직 간직하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서 끊임없이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동서남북 어디든지 가고 싶었던 유년시절의 꿈이 내겐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넋두리조차 명치끝으로 눌러놓고, 지극히 작은 행복의 테두리 안인 가정만을 위해서 꼬물꼬물 살아온 내 난쟁이 역정(歷程)을 잘 아는 아내는 꿈의 여행을 획책(?)하고 있었다. 고맙기 그지없다. 내가 정년을 몇 해 앞둔 어느 해에 육순나들이를 다녀오면서 내어놓았던 미국입국사증이 어느새 만료되었음을 재빨리 알아채어 수속하면서 나를 위로 해주는 아내의 말 한마디는 오십 년 긴 세월의 한풀이 한마디였다.

 

 ‘언니들과 함께 다니는 여행은 별 의가 없어요. 당신하고 실컷 돌아다니자면 세월이 짧아요. 그래서 미리미리 어려운 곳은 손을 쓰는 거예요!’ 내 꿈은 앞으로 얼마든지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순간순간이 행복에 넘쳐흘렀다.

 

지나간 한 세기의 역사적 전환기를 고스란히 체험한 나, 이제 그 실체적 진실에 피부를 비벼보고 싶다. 벽안의 '루스키'가 신고 온 장화가 디딘 동토를 밟아 보고, 어딘가에 묻혀있을 할아버지의 유골도 수습하고 싶다. 아직 꿈속이다.

 

유년시절에 전쟁을 겪은 나, 소위 ‘대동아 공영권’을 주창한 태평양전쟁의 산실인 일본의 '대본영'을 보며 거짓에 혼을 빼앗겼던 지난 어린 시절의 방공호파기의 훈령을 만져보고, 동쪽 하늘에서 솟는 아침 해의 진실을 알고 싶다. 그리고 퇴역한 화륜선도 타보고 싶다. 아직 꿈을 꾸고 있다.

 

아직 어렸을 때다. 대처에 나가보지 못했던 나, 동족상잔의 총알받이가 되었던 나, 추석날 밤을 찬이슬로 지새운 나, 웬만한 대처는 스쳤지만 어린이 수학여행만큼도 다녀보지 못한 내 견문을 활짝 넓히고 싶다. 또한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도 어디 있는지 가보고 싶다. 하지만 꿈은 아직 이어질 뿐이다.

 

눈사람 대신에 눈으로 탱크를 만들면서 한 겨울을 보낸 유년시절의 나, 찔레꽃 피는 남쪽나라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던 누나의 꿈을 이루어야 할 나, 남반구의 어느 곳에서 고모가 타고 왔던 기차와 다를 어느 나라 기차든지 타보고 싶은 나, 아직은 먼 꿈이다.

 

 

아내는 이런 내 꿈을 이루려한다. 그러나 이제 아내는 그렇게 서둔 내 미국비자를 내놓고 나서 내가 정년의 퇴임 전에 중병을 앓게 되니 모든 것이 또 꿈으로 남을 뿐이다. 어느 시인의 노래, 꿈은 깨어 무엇 하나!  아내 없는 이승, 모두 물거품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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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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