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다산이 혜장(惠藏)의 주선으로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머물러 있을 때, 그의 제자 미감(美鑒)이란 승려가 입이 잔뜩 나온 채 다산을 찾아왔다. 제 동무 스님들과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등류과(等流果)'의 해석을 두고 말싸움이 붙었는데, 다툼 끝에 분이 나서 책 상자를 지고 나온 참이라 했다. '등류과'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론(因果論)의 주요 개념이다.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를 낳고, 악인(惡因)은 악과(惡果)를 낳는다는 논리다.
다산은 그에게 몽당 빗자루 얘기를 들려준다. "선인이 선과로 맺어지면 기쁘고, 악인이 악과를 맺으면 통쾌하겠지? 하지만 세상 일이 어찌 다 그렇더냐? 반대로 되는 수도 많다. 그때마다 기뻐하고 슬퍼한다면 사는 일이 참 고단하다. 따지고 보면 그게 다 제 눈에 몽당 빗자루[敝帚·폐추]니라.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다 망상일 뿐이지. 꿈에서 곡을 하면 얼마나 슬프냐. 부르짖을 때는 안타깝기 짝이 없지. 하지만 깨고 나면 한바탕 웃고 끝날 일이 아니냐. 너도 그저 껄껄 웃어주지 그랬니? 그만한 일로 짐을 싸들고 나왔더란 말이냐. 딱한 녀석!"
송나라 때 육유(陸游)가 '추사(秋思)'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잃은 비녀 취해 봤자 어디다 쓰겠는가? 몽당비 볼품 없어도 제겐 또한 보배라네(遺簪見取終安用, 敝帚雖微亦自珍)." 폐추자진(敝帚自珍)은 제 집에서 쓰는 몽당비가 남 보기엔 아무 쓸모가 없어도, 제 손에 알맞게 길이 든지라 보배로 대접을 받는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다산초당 정착 초기에 지은 시에서 다산은 "궁한 거처 지은 책이 비록 많지만, 몽당비 천금조차 아까웁다네(窮居富述作, 千金惜敝帚)."라 했다. 남에게는 별 볼일 없는 저술이지만 자기에겐 천금의 값어치가 있다는 얘기다.
다산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든 미감은 그 길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다산학술재단에서 정리한 '정본 여유당전서'에 새롭게 수록된 '몽당 빗자루의 비유로 미감을 전송하다(敝帚喩送美鑒)'란 글에 실린 사연이다. 누구에게나 애지중지하는 몽당 빗자루가 있다. 하지만 남은 그 값을 안 쳐주니 문제와 갈등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