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현(柳觀鉉·1692~1764)은 1759년 필선(弼善)의 직책으로 사도세자를 30여 일간 서연(書筵)에서 혼자 모셨던 인물이다. '주역'을 가르쳤다. 사도세자가 죽자 여섯 차례의 부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벼슬에 있을 때는 흉년의 기민(饑民) 구제 등 볼만한 치적이 적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뜨자 김낙행(金樂行· 1708~1766)이 제문을 지어 보냈다. 길어 다 읽지는 못하고, 내용 중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難者二事)를 꼽은 대목만 간추려 읽는다.
'또 가만히 논하려니, 어려운 것 두 가지라. 가난하다 부자 되면, 의리 좋아하는 이 드물다네. 심하게는 돈 아끼다, 아우 죽여 돌아오지. 들으니 공께서 젊었을 때, 푸성귀와 멥쌀로 허기 채워, 부지런히 힘을 써서, 살림이 갖춰졌다네. (중략) 궁한 선비 뜻 얻으면, 평소 모습 지키는 이 드물다네. 공이 한성판관이었을 때, 가난을 괘념찮았지. 벼슬길에 나가서도, 농가에 그대로 살았고, 역말이 문에 서도, 농사 노래 들렸었네. 산으로 갈 기약 두어, 보리 파종시키셨고, 뽕과 삼을 말할 적엔, 시골 농부 앞다퉜지. 풍치가 초연하여, 경박한 이 경계로 삼을 만했네. 이것이 공의 우뚝한 점, 사람들은 잘 모르지(又竊論之, 難者二事. 先貧後富, 人鮮好義. 甚或惜金, 以弟喪歸. 聞公少時, 蔬糲充飢. 勤其四體, 旣有旣完. (…) 窮士得意, 鮮守平素. 有尹京兆, 不念龍具. 方公仕宦, 依舊田家. 馹騎在門, 園有農歌. 還山之期, 指以播麥. 談桑說麻, 野老爭席. 風致超然, 可警浮薄. 是公之高, 人或不察).'
이 제문에서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로 꼽은 두 가지는 '먼저 가난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되면, 의리를 좋아하는 이가 드물고(先貧後富, 人鮮好義), 궁한 선비가 뜻을 얻으면, 평소 하던 대로 지키는 이가 드물다(窮士得意, 鮮守平素)'는 것이다. 없다가 재물이 생기면 거들먹거리는 꼴을 봐줄 수가 없다. 낮은 신분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못 하는 짓이 없다. 결국은 이 때문에 얼마 못 가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이 한결같기가 참 쉽지 않다. 글 속에 돈을 아끼려다 동생을 죽여 돌아온다는 말은 전국시대 월나라 도주공(陶朱公)의 고사가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