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宋純)이 담양 제월봉 아래 면앙정을 짓고 '면앙정가'를 남겼다. 첫 부분은 언제 읽어도 흥취가 거나하다. 마치 천지창조의 광경을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무등산 한 활기 뫼히 동쪽으로 뻗어 있어, 멀리 떨쳐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무변대야(無邊大野)에 무슨 짐작 하느라, 일곱 굽이 한데 움쳐 무득무득 벌였는 듯. 가운데 굽이는 굼긔 든 늙은 용이 선잠을 갓 깨어 머리를 앉혔으니, 너럭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 탄 청학이 천리를 가리라 두 나래 벌였는 듯."
면앙정이 차지하고 앉은 지세를 노래했다. 우뚝 솟은 무등산이 한 줄기를 쭉 내뻗어 한참을 가다가, 넓은 들판 앞에서 심심했던지 지맥을 불끈 일으켜 일곱 굽이의 제월봉을 만들었다. 그중에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숨어 잠자던 용이 이제 그만 깨볼까 하고 고개를 슬며시 들었는데, 그 머리 위 너럭바위를 타고 앉은 정자가 바로 면앙정이란 말씀이다. 그런데 그 형세가 마치 장차 천리를 날려는 청학이 두 날개를 쭉 뻗은 형국이라고 했다. 장쾌하고 시원스럽다.
풍수가의 용어에 과협(過峽)이란 말이 있다. 과협은 높은 데로부터 차츰 낮아져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일어선 곳이다. 지관들은 말한다. 산세가 너무 가파르면 그 아래에 좋은 자리가 없다. 구불구불 끊어질 듯 이어지다 평평해진 곳이라야 좋다. 과협 중에서도 가장 으뜸은 평평하게 낮아졌다가 갑자기 되솟아오른 평지과협(平地過峽)이다. 면앙정의 지세가 꼭 이렇다.
불쑥 솟아 뚝 끊어진 곳은 근사해도 이어질 복이 없다. 기복 없이 곧장 쭉 뻗어내리면 시원스럽기는 하나 생룡(生龍) 아닌 죽은 뱀이다. 어찌 지세만 그렇겠는가? 사람의 인생도 다를 것이 없다. 죽을 때까지 안일과 즐거움 속에서만 살고, 환난과 수고를 멀리하는 삶은 쭉 뻗은 죽은 뱀이다. 한때 우뚝 솟아 만장의 기염을 토하다 제풀에 꺾여 나자빠지는 것은 불쑥 솟았다가 뚝 끊어진 혈이다.
너무 험하기만 해도 안 되고, 내처 순탄해도 못쓴다. 그래도 종내는 평평해진다. 사람이 윗자리로 올라가는 일도,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어쩌면 이런 굴곡의 반복에서 힘을 얻어야 가능하다. 단박에 이룬 로또는 절대로 오래 못 간다. 어쩌다 운이 좋아 성취한 허장성세는 잠깐 만에 무너져 버린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