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 해도 일은 끝없고 가도 가도 길은 멀다. 속도만 숨 가쁘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불안해서 더 하고 그럴수록 더 불안하다. 한 가지 일을 마치면 다른 일이 줄지어 밀려온다. 인생에 편한 날은 없을 것만 같다. 산적한 일 앞에 비명만 질러대느니 일을 덜어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처방이 절실하다.
홍길주(洪吉周·1786~1841)가 '수여연필(睡餘演筆)'에서 말했다. "일 중에 오늘 해도 되고 열흘 뒤에 해도 되는 것이 있다면 오늘 즉시 해치운다. 오늘 해도 괜찮고 1년이나 반년 뒤에 해도 괜찮은 것이라면 한쪽으로 치워둔다. 이것이 일을 더는 중요한 방법(省事要法)이다." 욕심 사납게 다 붙들지 말고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의 교통정리만 잘해도 일이 확 준다. 꽉 막혀 답답하면 일의 우선순위부터 점검하라는 얘기다.
율곡이 궁리(窮理) 공부에 대해 묻자 퇴계가 편지로 건넨 처방은 이렇다. "궁리에는 단서가 많습니다. 궁리하는 일이 혹 얽히고설켜 있어 애쓴다고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나, 내가 그 문제에 대해 잘 몰라 밝혀 해결하기 어렵다고 칩시다. 그러면 마땅히 이 일을 놓아두고 따로 다른 일을 궁리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궁리해서 오래 누적되어 아주 익숙해지면 저절로 마음이 밝아져서 의리의 실지가 점차 눈앞에 드러나게 되지요. 그때 다시 앞서 궁리하다 만 것을 가져다가 꼼꼼하게 따져 살펴 이미 알게 된 내용과 견주어 징험해 보고 비추어 본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앞서 처리하지 못했던 것까지 일시에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궁리의 활법입니다."
너무 복잡하게 얽힌 문제나 내 능력 밖의 일은 일단 밀쳐두고 역량이 미치는 다른 일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식견이 열려 앞서 난감하던 문제도 해결 실마리가 저절로 잡힌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 들면 답답한 기운이 쌓여 스트레스가 되고 마음이 병든다.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되 일의 경중과 선후를 잘 분별하는 것이 관건이다. 속도는 중요치 않다. 방향이 늘 문제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