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7년 명종의 환후가 심상치 않았다. 신하들이 여러 날 지키다가 병세가 조금 호전되자 다른 대신들이 자리를 비웠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혼자 지키고 있었다. 6월 28일, 밤중에 왕의 병세가 갑자기 위중해졌다. 이준경이 들어가 주렴 밖에 서서 왕후에게 후사를 누구에게 이을 것인지 물었다. "덕흥군의 셋째 아들 모(某)로 후사를 이으시오." 당시 입직했던 여러 재상 중에 섬돌 위로 올라온 자가 많았다. 이준경이 말했다. "소신의 귀가 어두우니 다시 하교해 주소서." 인순왕후가 모두에게 들리도록 두 번 세 번 또박또박 말했다. 모두가 분명히 들은 것을 확인한 뒤에 한림 윤탁연(尹卓然)에게 전교를 받아적게 했다. 윤탁연이 '제삼자(第三子)'라 적지 않고 '제삼자(第參子)'로 썼다. 이준경이 말했다. "이 사람이 누구의 아들인고?" 그의 노숙함을 칭찬한 말이었다.
후사 문제는 자칫 국가의 운명이 왔다갔다하는 중대사였다. 일점의 의혹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모두가 분명히 들어 한 점 의혹이 없은 뒤에 시행한 이준경이나, 삼(三)을 삼(參)으로 써서 혹 있을지 모를 변조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윤탁연의 침착함이 위기의 순간에 빛났다.
1830년 익종(翼宗)의 발인을 며칠 앞두고 빈소에 불이 났다. 불 속에 뛰어들어 관을 받들어 내왔다. 옻칠한 내관(內棺)이 몹시 두꺼워 밖은 탔어도 안은 말짱했다. 종척집사(宗戚執事) 홍현주(洪顯周)가 말했다. "천행입니다. 하지만 그냥 모시면 안 됩니다. 반드시 중전마마와 세자빈께서 입회하시어 근심과 의심을 풀어야 합니다. 고쳐 모실 때는 곡진하게 정회를 펴는 절차를 갖게 하소서." 마침내 절차를 갖춰 시신을 모셔내 새 관에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시신이 다 탔느니, 누가 일부러 그랬느니 갖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중전과 세자빈이 직접 입회한 소식이 전해진 뒤에야 여론이 겨우 가라앉았다.
임사주상(臨事周詳), 일에 임해서는 그 처리 과정이 주밀하고 꼼꼼해야 한다. 다급한 상황일수록 침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의 불길은 한번 치솟으면 걷잡을 수가 없다. 처음의 일 처리가 야무지지 못해 없어도 될 의혹이 생기고, 평지풍파가 일어난다. 천안함 사태의 처리 과정에서도 이런 경우를 수없이 보았다.//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