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푸른빛 안개 고여 있는 새벽,
키 큰 종려나무 아래로
백발노인 한 분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시더니
그 나무 아래 두 눈 지그시 감고
두 팔 벌리고 서 계시네
한참 뒤 다시 와 보니
아직도 그렇게 붙박여 계시네
시간도 경치도 모두 그 호흡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나무 위로 지나가던 큰 비행기 한 대
정지된 채 떠 있네
지리산 깊은 골짜기 텅 빈 산밭에
허수아비 한 분 서 계시네
눈바람 흠뻑 맞고도 따뜻한 듯
느긋하게 한겨울을 버티고 계시네
추위에 떨며 지나가는 이에게
솜저고리 벗어주고
깊은 들숨 쉬면서 그렇게 못 박혀 서 계시네
불던 바람도 그치고
공중을 빙빙 돌던 솔개의 날갯짓도
그대로 멈춰 있네
/백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