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질하기

외통인생 2019. 8. 25. 11:07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1246.001010 매질하기(부뚜막 바르기)

‘강터 고개’를 넘는 초입에 ‘매봉산’ 오름 길이 시작되고, 등 따라 오르다 보면 구덩이 속이 흰 흙으로 된 광맥인지 흙 맥인지, 다른 곳은 검거나 누런 흙인데 이곳만 유독 백토가 묻혀 있다. 해마다 봄가을, 이 구덩이가 몸살을 앓고 그 깊이가 더해짐에 따라, 구덩이가 무너져 내릴 위험 때문에 동네 어른들의 걱정이 어린 내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로 심각하다.

온 동네 이백여 집이 황토로 매질하여 ‘봄철 단장’을 하건만 깔끔한 집은 또 남다르게 온 집 안팎을 흰 칠로 단장하려 든다. 봄맞이 집 단장 검열을 ‘주재소’ 순사와 면 직원들로 짜인 심사단(?)에 보이고 그 등급에 따라서 손바닥만 한 표딱지를 받아서 집 밖 기둥에 붙여놓고 가을철까지 청결을 다짐하는 징표로 삼으며 후일 몇 집을 뽑아서 상도 내리는가 보다. 일 년에 두 번, 꽤 부지런해야 하는 농사철과 뒤얽힌 연례행사다.

자그마한 반동이 함지를 한쪽 죽지에 끼고 한 손은 호미, 다른 손은 나를 잡아 이끌고 그 ‘강터 고개’로 가시는 어머니의 속셈은 행여 비상시에 쓰일지도 모르는 내 조그마한 몸을 염두에 두셨는데, 어머니의 짐작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백토의 맥은 어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구덩이로 좁고 깊어졌고 비스듬하고 속은 어두컴컴하다. 어른들만으로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 돼 있다.

흙이라야 물에 풀어서 쓸 물감 정도이니 어린이 머리 크기만 하면 온 집안을 매질하고도 남을 분량이고, 호미 몇 번 찍어서 당기면 될 터인데 좀 어두운 것이 꺼림직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뒤에 앉아 계시고 내 허리를 잡아당겨서 마음 놓고 거꾸로 매달리다시피 해서 흙을 찍었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호미는 푹푹 꽂히고, 움켜 담는 손이 차갑지만 부드럽다. 무게가 내 어깨를 당기지만 어머니가 힘을 주시니 그만이다. 몇 번을 바가지에 담아낸 후 내 허리춤은 뒤로 당겨지고 내 머리는 굴 밖으로 나왔다.

이 굴이 평지로 됐다. 굴로 변했다가 하는 것은 그만큼 이 흙을 이용하는 분들이 많음을 말하며 아마도 올가을에는 구덩이가 메워지고 다른 자리에서 그 맥을 찾아 파고들어 갈 것이다.

그 언저리를 탐사하여 백토 자기 공장을 크게 세울 만도 하련만, 아직 그때는 그런 궁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나 보다.



모든 집기는 마당에 내놓이고 벽과 방바닥과 부엌 부뚜막이 발가벗겨져서 나간 집같이 됐다. 흙비에 묻혀 위로부터 아래로 칠해 가는 어머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칠하셨을까? 나는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건을 쓰시고 덧옷을 걸치시고는 능숙하게 칠하신다.

집 안팎은 백색으로 단장되고 연기그을음은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분통이 되고, 부엌의 그릇들이 제자리에 놓이면 집 단장은 끝났다. 하나 부엌 위의 천장은 아직은 검게 그을려 있다. 아니 어머니의 속을 비추기라도 하듯이 영원히 검게 그을려 있을 것이다.

상큼한 흙냄새, 솔가지 타는 송진내와 이 불길이 골을 지나서 굴뚝으로 나는 내가 어우러져서 이 세상에서는 맡을 수 없는 우리 집만의 냄새가 되고, 게다가 부글거리는 화로 위 된장찌개 냄새가 더하여 저녁 향기를 품는다면 모름지기 내가 그때 당장 소경이 되었어도 그 냄새를 맡아 십 리 밖에서도 찾았으리라.

우리 집이 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우민계도차원(愚民啓導次元)에서 이 일이 당시로서는 합당했는지는 몰라도, 사람은 반드시 이런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는 몰라도, 아직은 마을의 소박한 아낙들의 잠자는 본능에 불을 붙여 부채질하는 꼴이 되었다. 위생 관념을 앞세운 한 무리의 부추김이 너무나 얄팍해 보였다.

우리 어머니는 남들과 경쟁할 만한 성품을 지니지 못하셨으니 모름지기 가라앉은 백토의 앙금을 휘저어 놓으셨을 것 같다./외통-



'외통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원지2  (0) 2019.08.28
소나무와 내  (0) 2019.08.26
  (0) 2019.08.23
시샘  (0) 2019.08.23
기적  (0) 2019.08.19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