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내 어린 시절의 기나긴 여름나기는 감자와 더불어 익어가고 또 이어졌다.
올감자, 하지감자, 늦 감자, 자주감자, 언 감자. 썩은 감자, ‘회양’ 감자, 들 감자, 씨감자, 일 년 동안에 들을 수 있는, 할머니로부터 흘러나오는 감자 이야기들이다.
집안일을 마치고 들길에 나서는 어머니의 손에 끌려 나갔다. 친구들 아쉬운 듯, 뒤돌아보며 칭얼대는 나에게 어머니는 밭에 나가면 ‘아버이’가 참외 따 준다고 꾀어서 나를 이끄셨다.
아무 죄도 없는 돌부리를 걷어차고서 발가락을 쥐고 깡충깡충 뛰면서도 아랑곳없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쫓든 나, 돌 차며 벗겨진 외짝 신을 이내 집어 들고 집 앞에 흐르는 도랑에 배 띄운 나. 배 따라 내려가다 우마차 건너는 다리 밑에 신짝이 걸린다. 캄캄한 다리 밑이다. 물 위로 솟아있는 큰 돌이 깔고 있는 나무그루터기에 걸려있는 외짝 신은 떠내려오지 않는다. 그때야 동동 발 구르며 엄마에게 뛰어가서 조른다.
멎은 채 괴어 굳은 발가락 위의 피를 보이고 어리광을 부리면 되었다. 잃어버린 신은 삼베 행주치마를 잡고 당기기만 하면 아무 탈 없이 되돌려지는, 신나는 시절이었다.
‘동자원’의 바닷가에 있는 밭으로 가는 길은 기찻길처럼 늘어진 제방을 넘고 개울을 건너서야 갈 수 있다. 돌과 자갈과 모래가 보석처럼 깔린 맑은 물속을 은어가 떼 지어 노니는 개울, 아침저녁으로 송아지 딸린 암소랑 황소가 논밭으로 오갈 때 건너는 개울, 한가롭게 풀 뜯으러 들락거리며 애 어른을 마다하지 않고 등에 태운 소들의 발 씻는 개울, 돌아올 때는 콧김으로 송사리 떼를 흩으며 물을 들이켜 배 불리는 개울은 우리 동네 사람들의 생활 속을 흐르는 생명의 내다.
사람은 사람대로 소는 소대로 그들이 무엇인가를 얻고자 대대로 건너다니는 시냇물이다.
여기 놓인 돌다리를 나 또한 건넜다. 벌써 종달새는 하늘 높이 제자리 떠서 제 새끼 다칠세라 지져대고 있다. 구슬 같은 이슬이 반짝이는 해당화가 짙은 향기를 뿜는다. 그 위에 한 쌍의 백로가 공기를 쳐올리며 양발을 수직으로 서서히 내리더니 긴 목을 빼 늪 가로 사뿐히 않는다.
‘해당화밭’을 가로지르는 우마차 길을 한참이나 걸어서 이르는 곳, 어린 나로서는 괘나 먼 길이었다. 후에 ‘소학교’에 들어가 사 학년이 되었을 때 안 일이지만 바닷가까지 이어진 동네 제방 길이를 1킬로미터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밭은 한 오리길이 좀 못되었나 보다.
길게 늘어서서 꼬리를 이어 가는 개미 줄이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눈 팔지 말고 훨훨 가자는 ‘어머이’, 머리 위에 무거운 함지를 이었는데, 나를 앞세워 걸릴 때마다 하시던 채찍의 말씀을 오늘도 또 이르시건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쪼그리고 앉았다.
밝다 못해 현미경 같이 확대되어 보이는 내 눈에 비치는 세상 모두가 새롭고 의미 있는 것뿐이다. 죽은 새끼 방아깨비를 끌고 가는 한 무리의 개미역사를 또렷이 본다. 죽은 방아깨비는 날개가 찢어지고, 다리는 부러졌다. 부러진 죽지를 집게 같은 주둥이로 아귀 차게 문 개미는 제 몸이 뒤집히든 제쳐지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지 바로 서서 허리와 발을 잽싸게 움직이면서 일을 계속한다. 여러 마리의 개미는 한 덩어리가 되어 모래 위든 박힌 돌 위이든 풀포기든 나무뿌리이든 넘고 헤쳐 끈질기게 잘도 간다.
이 개미는 누구의 은혜를 갚으려고 이렇게들 몰려갈까? 어린 나를 멈추게 한 내면의 호기심이다. 미물의 보은(報恩) 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었다.
착한 시골 어린이가 길을 가다가 개미 떼를 만났다. 밟고 지나가지 않고 길가에 있는 싸리 가지를 꺾어서 개미 떼를 살살 쓸어서 한 마리도 다치지 않게 하고는 길을 건너갔다. 그 뒤 악당들에 붙잡힌 어린이는 두목에게 끌려가 일련의 시험을 치러야 풀려나는, 신세가 되었다. 독방에 가두어 놓고 큰 바가지에 소금과 설탕을 섞어서 가득 채워 담아 빈 바가지 두 개와 함께 내밀며 날이 밝을 때까지 설탕과 소금을 가려 따로 담아 놓도록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겠단다. 꼼짝없이 잡혀 있게 되었다. 어린이는 앉아서 엉엉 소리 내며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문틈으로 새까맣게 몰려온 개미들이 바가지의 소금과 설탕을 부지런히 물어 날라서 소금은 소금대로 설탕은 설탕대로 다른 바가지에 채워 놓는 것 아닌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날은 샜다. 확인한 악당 두목은 이 어린이의 신통함에 놀라 즉시 풀어주어 무사히 되돌아왔다. 바로 그 보은의 개미들이 아닌가? 누나의 옛이야기 속에 빠졌다.
방아깨비는 왜 죽었으며 개미는 어떤 권리로 다른 종의 시신을 가져갈까? 어디로 가며 어떤 힘으로 통솔이 되고 지도할까? 질서의 놀라움을 죽음을 앞에 둔 지금에서야 생각나게 하는, 또한 질서 속의 나를 의식하게 하는, 지금도 눈에 선한 그 시절의 아침 한때였다.
파도 소리가 들리고 상큼한 바다 향이 세상 냄새에 길들어지지 않은 내 코에 스며들면 어느새 밭은 가까이에 와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뛰어 달려가면 우리 소가 먼저 반기는데, 내 고함(高喊)은 소귀를 스쳐 바닷가로 날렸건만 파도 소리에 밀려 그냥 되돌아온다.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바닷가에 산을 이룬 천연의 모래 언덕은 바람을 공중에 날려 파도 소리만 그저 우렁차게 들릴 뿐이다.
할머니를 예 일곱 번 불러서야 밀짚모자가 움직이고, 밭고랑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아버이’는 호미를 풀 섶에 던지신 다음 젖은 삼베적삼 소매를 걷어 올리시며 ‘어머이’ 머리 위의 함지를 받아 내린다.
나는 신을 벗고 밭이랑을 달려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가만히 내려다본다. 할머니의 손은 감자포기에 북을 돋아주시고 익은 ‘당 콩’을 따서 싸리 ‘종댕이(다래끼)’에 넣는 동작을 반복하시면서 내가 옆에 와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신다.
할머니는 감자포기에 북을 돋을 때 반드시 그 감자포기 밑을 손가락으로 더듬으셨다. 먹을 만한 크기의 감자알이 달려있는지를 알아보는 일손이다.
논 사랴, 밭 사랴, 쌀 팔아 돈하고, 겨울 저녁엔 저녁 죽 한 끼, 긴긴 여름날에는 올감자 캐 먹기로 긴 세월을 사신 할머니시다.
백발이 성성하여 치아라고는 하나 없이 홀쭉한 볼에 목은 길어 학의 목 같으니, 세월의 한인지 남편의 그리움인지, 할머니를, 우리 할머니를 저렇게 만드셨다.
파도 소리와 바다를 따라 오르내리는 기차가 울리는 네 번 기적소리와 하루에 한 번 중석광의 점심 남포 소리만을 끊임없이 들어오신 할머니이시다. 단 한 번의 점심 남포 소리 외에는 아무 뜻도, 의미도 없는 소리일 따름이다.
귓바퀴에 입을 대고 큰소리로 ‘할머니’하고 불렀다. 소리치는 내 얼굴을 올려 보시고는 그제야 팔을 벌려 나를 않으시고 등허리를 다독여 주신다. 어느새 ‘어머이’가 오셔서 할머니와 바꿔 앉으신다.
늘 내 몫인 물 떠오기다.
주전자를 들고 솟아나는 샘가에 가서도 장난에 미쳤다. 파도 소리는 점점 크게 들린다. 밭이랑 한 개의 절반가량은 ‘어머이’와 함께 당 콩 따는 몫을 그런대로 어설프게 했지만 더는 궁금해 못 견디어 바닷가언덕을 향해 튀어 나갔다.
섬 덩이만 한 ‘화륜선’이 가는 듯 마는 듯, 하지만 검은 연기 꼬리로 배가는 방향을 어림하게 한다. 말만 들은 ‘원산’ 쪽으로 가는 것 같다.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아득히 이어진 모래 언덕과 끊임없이 밀려나는 흰 파도가 이어질 뿐이다. 하지만 민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몫이면 내 놀이터는 그저 그만이다.
양손 양발 합쳐서 모래로 둑을 쌓았고 물길을 내 마음대로 돌려놓아 기쁨을 쌓으며, 정신없이 노는데, 바람을 밀어제치고 들려오는 소리에 제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어머이’가 곁에 오신 것을 알았다.
할머니와 ‘어버이’ 모자간에 늘 그렇게 아침밥을 잡수셨던 것처럼 오늘도 또 그렇다.
육십 성상을 교감하는 풀 섶의 말 없는 식사다.
흙에서 나온 감자를 먹고 바닷바람을 키고 하늘의 햇빛을 받아 달의 고요와 비벼서 별에 나누어주는, 그런 기나긴 세월이었다.
‘아버이’가 내놓는 것은 참외였다. 참외를 심지 않은 줄 뻔히 아는 내가 아닌가? 맛있게 먹고 ‘어머이’께 물었다. 어디서 났어요? ‘어머이’는 말이 없다.
할머니는 웃으시고 ‘어머이’와 ‘아버이’는 마주 보고 씽끗 하신다.
오래전에 맡아놓으신 밭두렁의 개똥참외다. 참외를 먹은 사람의 배설물을 개가 먹고 또 그 개가 밭두렁에 배설하여 그야말로 충실한 비료를 먹고 맺은 자연의 진미이다.
나는 이렇게 자연과 순화되었다. 쓰라린 아픔을 안은 할머니의 한 생을 기리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