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터’ 고개 초입에서 ‘매봉산’ 오름 길이 시작되는 산 등을 따라 오르면 구덩이 속이 흰 흙으로 된 광맥인지 흙 맥인지, 다른 곳은 검거나 누런 흙인데, 이곳만 유독 백토가 묻혀있다.
해마다 봄가을, 이 구덩이가 몸살을 앓는다. 그 깊이가 더해감에 따라 구덩이가 무너져 내릴 위험 때문에 동네 어른들의 걱정 소리가 어린 내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로 심각하다.
온 동네 이백여 집이 황토로 흙질하여 봄철 단장을 하건만 깔끔한 집들은 또 남다르게 온 집 안, 밖을 흰 칠로 단장하려 든다.
봄맞이 집 단장 검열을 ‘주재소 순사’와 면서기들로 짜인 심사단(?)에게 받고, 그 등급에 따라서 손바닥만 한 표 딱지를 받아서 집 밖 기둥에 붙여 놓아야 한다. 가을철까지 청결을 다짐하는 징표로 삼으며 후일 몇 집을 뽑아서 상도 내리는가 보다. 일 년에 두 번, 꽤 부지런해야 하는 농사철과 뒤얽힌 연례행사다.
자그마한 함지를 한쪽 팔죽지에 끼시고 한 손엔 호미, 다른 손은 나를 잡아 이끄시고 그 강터 고개로 가시는 어머니의 속셈은 행여 비상시에 쓰일 내 조그마한 몸을 염두에 두셨는데, 어머니의 그 짐작(斟酌)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백토의 맥은 어른들이 들어갈 수 없게 작은 구덩이로 좁고 깊어지며 비스듬하다. 구덩이 안은 어두컴컴하다. 어른들만으로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 됐다.
흙이라야 물에 풀어서 쓸 물감 정도이니 어린이 머리 크기만 하면 온 집안을 흙질하고도 남을 분량이고, 호미 몇 번 찍어서 당기면 될 터인데 좀 어두운 것이 꺼림직하다.
하나, 어머니가 뒤에 앉아 계시고 내 허리를 잡아당겨서 마음 놓고 거꾸로 매달리다시피 해서 흙을 찍었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호미는 푹푹 꽂히고, 손으로 집는 느낌이 차갑지만 부드럽다. 무게가 내 어깨를 당기지만 어머니가 힘을 주시니 그만이다. 몇 번을 바가지에 담아낸 후 내 허리춤은 뒤로 당겨지고 내 머리는 굴 밖으로 나왔다.
이 백토 굴이 평지로 됐다면 다른 곳이 굴로 변했다는 것, 그만큼 이 흙을 이용하는 분들이 많음을 말하며 아마도 올가을에는 구덩이가 또 메워지고 다른 자리에서 그 맥을 찾아 파고들어 갈 것이다.
그 언저리를 탐사하여 백토 자기 공장을 크게 세울 만도 하련만 이직 그때는 그런 궁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나 보다.
모든 집기는 마당에 내놓이고 벽과 방바닥과 부엌 부뚜막이 발가벗겨져서 나간 집같이 됐다. 흙비에 흰 흙물을 묻혀 위로부터 아래로 칠하시는 어머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칠하셨을까? 나는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건을 쓰시고 덧옷을 걸치시고는 능숙하게 칠을 하신다.
집 안, 밖은 백색으로 단장되고 그을음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분통이 되고 부엌의 그릇들이 제자리에 놓이면 단장(端莊)은 끝났다.
그러나, 부엌 위의 천장은 아직은 검게 그을려 있다. 아니 어머니의 속을 비추기라도 하듯이 영원히 검게 그을려 있을 것이다.
상큼한 흙냄새, 솔가지 타는 송진내와 이 불길이 구둘 골을 지나서 굴뚝으로 나가는 내가 어우러져서 이 세상에서는 맡을 수 없는 우리 집만의 냄새가 되고, 게다가 부글거리는 화로 위 된장찌개 냄새가 더하여 저녁 향기를 품어낼 때는, 모름지기 내가 그때 당장 소경이 되어도 그 냄새를 맡아 십 리 밖에서도 찾았으리라.
우리 집이 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우민계도차원(愚民啓導次元)에서 이 일이 당시로서는 합당했는지는 몰라도, 사람은 반드시 이런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는 몰라도, 아직은 마을의 소박한 아낙들의 잠자는 본능에 불을 붙여 부채질하는 꼴이 되었다. 위생 관념을 앞세운 한 무리의 부추김이 너무나 얄팍해 보였다.
우리 어머니는 남들과 경쟁할 만한 성품을 지니지 못하셨으니까, 아마도 평생을 통해 깊숙이 가라앉은 앙금을 휘저어서 희게, 뽀얗게 칠하셨을 것 같다.
칠하실 때, 어머니는 당신의 속도, 세상도 함께 하얗게 칠하시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