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막이

외통궤적 2008. 4. 1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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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001015 보막이

‘동자원’ 넘어 북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은 우리 고장의 자랑으로 꼽힌다.

이 들판은 개울을 몇십 리나 거슬러 올라가서 개울의 어느 여울 목의 한 곳을 막아 만든 보에서 시작하여 별도의 큰 도수로를 지나고 또 봇도랑을 이루어 넘실거리며 흐르는 물로 농사를 짓는 큰 들판이다.

이른 봄에 시작되는 이 보막이 행사는 그해 농사의 시작이고, 빠질 수 없는 의무적 공동봉사의 장이다. 그러므로 그곳의 논을 부치는 사람은 빠짐없이 참여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하루의 일인데도 나를 이 보의 보수공사의 ‘골 때우기’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동네에서 아버지를 신뢰하는 까닭이었다.

모두는 이를 묵인했다. 고마운 일이다. 그럴 나이가 된 초등학교 삼 학년 때인 것 같다.

긴 수로의 끝에서부터 쳐 올라가는 일에는 나 같은 어린이가 할 일이란 없다. 늘 그 일을 했음 직한 장정 몇이 보도랑 속에 들어가서 쳐내며 닦아 올라가면서 둑 위로 건져진 잡동사니를 우리 또래의 조무래기들이 날라다 한곳에 모아 놓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가 하면 많은 사람은 보로 바로 올라가 널따란 개울을 막는 일이 시작된다. 이때는 각자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자조적 협동의 막바지를 이룬다.

말뚝과 거적, 솔가지 다발 등을 준비하여 이곳에 미리 온 다른 일행에 의해서 무너진 한 귀퉁이부터 막는 공사는 이미 시작됐다. 우리는 여기 합류해서 법석을 이루며 저마다 할 일을 찾아서 이리 뛰고 저리 설친다.

이제 큰 개울물이 봇도랑을 통하여 흐르게 되고, 비가 와서 물이 많아지면 이 보를 바로 넘어서 바다로 흘러 닿을 것이다. 이 도랑을 통하여 흐르는 많은 물은 아직은 논에 댈 시기가 아니니 짧은 거리를 흐르다가 다시 개울로 쏟아내는, 옆구리 터진 봇도랑 만드는 일이 또 보 막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는 요즈음 말로 하면 개폐식 장치인데 제법 틀을 짜 만든 물막이 장치이다. 이 주위를 튼튼히 하는 일은 전문으로 해마다 하는 어른들, 특히 봇물을 책임진 그해 물 감수는 감독을 철저히 받아야 한다.

몽리자(蒙利者)들은 가을에 얼마씩의 벼를 내고 그해의 도감(都監) 수는 이를 내지 않고 농사를 짓게 되는 것이다.

보(洑). 우리 농촌의 공동 관심사 중 가장 큰 것이 있다면 이 보일 것이다. 언제든지 연장을 들고 생명을 걸어 달려갈 수 있는 보, 물밑에 잠잠하게 갈아있다가도 여차(如此)하면 이성(理性)조차 잃을 수 있는 무서운 잠재력을 안고 고요히 천 년을 이어오는 우리 삶의 터전 보, 이 보막이 일에 어린 내가 일찍이도 참여했으니 스스로 대견하다. 또 그때 체험한 모두는 우리 조상의 옛날을 짐작하는 디딤이 된다.

일손이 모자라는 우리 집은 우리 동네에서 여러모로 인정해 주는, 푸근한 인심으로 감싸 안겨 지낸다. 우리 집이 종가이고 보호받을 만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내가 가끔 나가는 동네 어떤 모임에도 다른 집 어른들이 이의를 달지 않고 오히려 대견해한다. 누구누구네! 집 손자라면 무사통과다. 그런데 유독 일인들의 간섭하에 놓인 부역(負役)에서는 그 책임을 따지는 일이 자주 있고, 동네 어른들도 이 아첨하는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가 보다.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은, 모든 배급을 이들이 관장하고 이들의 비위에 거슬리면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해를 입히고 말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을 섭섭한 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우리 집 사정이다.



우리 동네 신작로 보수 부역에 내가 또 나가는데, 이번에는 보막이와는 달라서 어느 집도 빠질 수 없는 호구 단위로 참가하는 늦은 봄, 초여름 행사다.

호구마다 한 사람씩 나와야 한다. 집집이 사정들이 있어서 여자들은 물론 어린이들과 불편한 몸의 어른들도 수두룩하게 모인다. 오늘 나온 온전한 일꾼들은 아마도 일인들의 눈치를 보는 분이거나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신작로 부역은 동구 밖에서부터 오리를 넘게 내려가서 바닷가 ‘장사 바위’까지를 우리 동네서 해야 한단다.

튀겨나간 자갈을 주어 올리고 자동차가 지나면서 밀어낸 자갈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고르게 메워 넣는 일이 오늘의 도로보수 부역에서 해야 하는 일인가보다.

어느 시대나 세대의 갈등은 있었든지, 그날도 우리 또래의 불만은 작업의 능률이다. 우리가 보기에 부지런하게 하면 몇 시간 안에 끝날 것 같은데도 어른들은 느릿느릿하게, 장승이 안 되리 만하게 움직이며 그냥 노닥거리기만 한다.

어른들에게 의견을 말할 수는 없으니, 우리끼리 따로 작업을 하기로 의논하고는 삽을 울러 메고들 그냥 신작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우리 동네가 해야 하는 몫 구간의 절반쯤 되는 거리에 이르러서 신작로 한가운데를 굵고 길게 가로질러서 금을 그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부역한 구간이니까 그리 아시고 알아서 명부에 올리시오’ 하는 투, 무언의 항변이기도 한, 누가 봐도 획이 확연한 금이다. 이는 나중에 이설을 막으려는 꼬마들의 어른들에 대한 경고와 다름, 아니다.

금을 긋고 나서부터 비지땀을 흘려가며 미친 듯이 일한다. 쉬지도 않는다. 길을 고르고 다듬어서 내려가 우리 구역의 마지막까지 했다. 아마도 어른들이 한 것보다 더 말끔히 했을 것이다. 그 지점은 바닷가와 닿은 곳이다. 이곳은 ‘송방’ 골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다리가 놓인 곳, 곧 우리 동네에서 일할 몫의 끝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초여름의 날씨,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할 일을 합심하여 이룩했고 그 덕으로 어른들이 일하는 이 시간에 푸른 바다와 맑은 내를 들락거리며 멱을 감는다.

고함을 지르며 물길을 찬다. 양팔을 벌려서 하늘에 솟았다가 곧 바다 밑 조개를 찾아서 자맥질한다.

어른들이 작업구역의 마지막까지 점검할 즈음 우리는 ‘송방’ 골에서 내리는 민물에 몸을 헹구고 바위 위에 올라서 또래가 하는 몸 말리기 동작을 한다. ‘짝짝 말라라! 짝짝 말라라!’ 볼기를 두드리고 서로를 바라보고 어른에게 보라는 듯이 신 낸다.

우리는 남극의 펭귄처럼 우짖고 물개처럼 놀다가 해거름에서야 집으로 향했다. ‘장사 바위’도 우리를 지켜보고 미소 지었으리라.

지금 고향에 가본다면, 아마도 한길은 포장되었을 것이니 나를 몰라볼 것이다. 하지만 그 ‘장사 바위’는 지금도 옛 그대로 있어 나를 반길 것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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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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