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일 하나 있다.
일제 치하에서, 술래 돌기의 변형인 야경이 있었는데, 그 야경(夜警)이 밤에 마을을 돌 때 반드시 박달나무 방망이를 치며 마을을 돌 게 돼 있었다.
생각으로는 박달나무 방망이 소리로 도둑을 미리 쫓고 불량배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예방 효과를 얻으려고 한 것 같고, 다르게는 이 방망이는 불을 일으키는 도깨비를 혼내는 주술적 의미도 있는 것 같다. 또 달리, 방망이 소리를 내지 않고 순라(巡邏)를 돈다고 생각해 보면, 도둑을 잡거나 불량배를 잡을 가능성이 더한데도 불구하고 이 소리 내는 방법을 택한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즉 야경을 도는 사람을 불신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일본인들은 앉아서 천 리를 보듯이 소리로 근무자의 성실성을 점검하는, 절묘한 수단으로 택했는지도 모른다.
이때 이장 집을 근거지로 할 수도 있고 ‘공회당’을 이용할 수도 있는데 거의 사랑방이 있는 이장 집을 이용하는 이유는 온돌방이 있기 때문이다.
야경을 서는 시기는 겨울철이 고작인데 불을 예방함이 야경의 첫째 이유가 되는 것은 계절적인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고, 도둑과 불량배는 구실에 불과하다. 그러니 불을 보러 다니는데, 갈 곳이 따로 있을 리 없는 순라가 지금처럼 순찰함을 두어 표를 하고 다닌다 해도 그 순찰함은 또 누가 걷는단 말인가.
이래저래 박달나무 두드리는 소리로 위치의 원근(遠近)을 가늠하고 근무의 성실도를 알려고 그랬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그 의도 자체가 자기모순에 봉착하는데 이름하여 ‘골 때우기’다.
이 ‘골’ 때우기에 꼬마 순라, 내가 동원됐다. 아버지의 급한 용무로 인해서 당직 일행의 양해로 큰 몫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행장을 단단하게 갖췄다. 밖의 바람은 옷섶을 뚫어 심장에 맞닿고, 발바닥은 얼음을 디딘 듯 시리다. 툇마루를 내려서니 회오리가 발아래 가랑잎을 맴돌려서 돌담 밑을 쓸고 모퉁이로 사라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감나무 가지 위에 휘영청, 달이 걸리고 까치밥 두 알이 달 아래 매달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별이 쏟아질 듯 날아갈 듯 흔들리고, 매달렸든 까치밥은 끊어진 연처럼 흔들려 떠나간다. 발걸음 소리는 바람 소리에 묻히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전신주의 비명(悲鳴)이 내 귀를 뚫고서 하얀 초가지붕을 타고 돌담을 넘는다.
소리는 내 꿈 꾸던 내 집 문틈으로 비집고 문풍지를 흔들고서야 비로써 잔잔했으리라.
밤은 깊다.
세상은 흑과 백의 대결장으로 된 듯하다. 나뭇가지 그림자가 내 몸을 덮쳐서 흔들고 지나간다.
딱딱 딱 따르르, ‘손모아장갑’ 속으로 전류가 흐르고 소리는 전선을 타고서 전신주 우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맴돌아 바닷가로 날아간다.
방망이 소리야 내 친구 꿈속에도 들리고, 그리고 불 밝힌 우리 집에도 들러서 가거라.
난 오늘 어른이 되어 보았다. 열 살짜리 어른! /외통-